4. 사랑
“나는 장거리가 싫은데 너 때문에 했어.
내가 원했던 연애 방법을 포기해 가면서도 했던 연애의 끝이 이거야?”
전연인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모두 최악의 말을 하게 된다지만 아마 악의가 있지 않았던 이 말은
내 마음에 이상한 흉터를 남겼다.
직전까지 울고 있던 내가 그 말을 듣고,
“그럼 너한테도 이 연애를 그만하는 게 맞겠네” 라며 울음을 뚝그쳤다.
그만큼, 그 한마디는 내게 큰 충격이 컸나 보다.
해외생활을 하는 나는 어떻게든 장거리를 해야 하는 운명이다.
1년의 8달은 영국에, 4달은 한국에 있는 나는,
어딜 가든 나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다.
가벼운 연애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조건이지만,
그렇지 않은 나에게는 감당해야 할 무게였다.
전 연인에게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별 생각이 없던 것 같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면,
기꺼이 해낼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말을 듣자마자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가장 아름다운 20대를 낭비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보고 싶다 하면 집 앞으로 달려가고,
밤에 운동복을 입고 노을을 바라보고,
좋은 일이 생기면 달려가서 안아줄 수 있는
그런 연애를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없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혹시나 연애가 잘 풀리지 않아 헤어짐을 맞이할 때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상대방이 후회할까 상상만 해도 마음이 아리다.
꼭 이 마음은 나에게 사랑을 사치로 느끼게 한다.
감히 그런 연애를 하자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거라고,
누군가가 소중해지게 되면 애써 외면하게 된다.
그 죄책감은 나에게서 용기를 앗아가 버렸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특히 해외 생활 속의 사랑은 불확실성 속에서 더 흔들린다.
나중에는 어디에서 일을 하고 싶은지,
시민권을 따고 싶은지,
그런 불확실성에서, 서로 확실한 사랑을 바란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서로의 미래에 자신이 없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결국 감당하기 힘든 질문 앞에 서게 된다 –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될까?”
사랑을 하려면 감당해야 하는 거라는 걸 알지만,
함께 유학하는 친구들이 “남자친구 미래에는 내가 없는 것 같아.
근데 내 미래에도 그 사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하며 눈물을 흘릴 때마다,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했던 것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지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랑의 간사함 앞에서, 나는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그렇게 간사하고, 무서운 사랑이지만
그래도 내가 허울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겁이 많은 내가 나의 마음이 다칠까 두렵더라도
내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눈을 마주치고 웃을 때,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그저 나의 눈에 담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가끔 그가 보여주는 미소에서도 그런 사랑이 느껴져
그 사람이 겪었을 아픔과 행복에 내 마음이 아려 눈물 고이게 할 사람.
그래, 그런 사람과 솔직한 사랑을 하고 싶다.
함께 매일 산책을 나가진 못해도, 서로를 떠올릴 때면 사진 한 장을 보내는 그런 사랑.
공항에서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모든 거리를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랑.
그리고 그때는, 내가 도망치지 않았으면 한다.
제발 이 삶이, 민달팽이 같은 나에게 그 작은 용기만은 남겨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