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또한 빛나는 인생이라고 말해주길
보나는 말 그대로 넘치는 생명력 덩어리 같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온 방안을 돌아다녔고 시간마다 밥을 챙겨줘야 했다. 보니는 그런 보나가 궁금한 것인지 보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냄새를 맡곤 했다. 민서의 지루한 하루 일과에 보나를 돌보는 일이 추가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나면 어느새 보니와 보나가 민서의 발 밑에 와 앉아있거나 엎드려있었다. 보나와 함께 산책을 가고 싶었지만 아직 너무 어려 산책을 갈 수 없음을 안 민서는 고민하다가 보나를 넣어 다닐 수 있는 조그만 강아지용 가방을 샀다. 그 가방에 보나를 넣으면 보니와 함께 셋이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보니와 보나의 밥을 챙겨주고 민서도 함께 밥을 먹었다. 민서는 먹고 싶을 때 양껏 먹고,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배가 고프면' 먹는 안 좋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민서는 100kg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갖게 되었고 그런 그녀의 외모는 민서 스스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수만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나가 오고 나서부터 시간마다 챙겨주어야 할 일이 생기니 자연스레 민서의 일상도 '규칙'이 생기고 있었다. 하루에 3번 보니와 보나를 끌고 산책을 가는 것 같은 것 말이다.
민서의 일상 중 하나 더 추가된 것이 있다면 보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 온 방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보나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의미 없이 틀어놓는 애니메이션은 꺼진 지 오래였다. 수백 번을 돌려본 애니메이션보다 보나를 구경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보나의 몸짓을 보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보니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보니는 조용하고 다정해서 보니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보나는 그 작은 몸짓에 생명이 깃들어 있어서 그 생명의 기운이 민서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보나가 민서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보니도 전과 다르게 꼬리를 흔드는 일이 많아졌고 보나를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느라 집안을 더 많이 돌아다녔다. 부모님도 퇴근하고 나면 보나를 쓰다듬느라 얼굴에 긴장이 풀리고 웃음기가 돌았고, 민석도 관심 없는 척했지만 보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궁금해했다. 모두가 보나를 막내둥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보나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제법 걷는 것에도 능숙해졌고 먹는 것도 잘 먹었다. 밖에서 조그만 소리라도 들리면 낑낑대는 게 전부였던 녀석이 왕왕 짖기도 했다.
"보나, 방석을 물면 안 돼"
맨바닥에 있는 녀석이 안 돼 보여서 방석을 깔아주었던 참이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보나는 방석 끝을 조그만 입으로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강아지들의 저런 행동은 이가 나려고 해서 간지러워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검색해 본 민서는 조심히 보나를 들어 입안을 들려다 보았다. 작고 하얀 이빨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민서가 입에서 손을 떼가 보나가 입을 쩝쩝거리며 민서를 바라보았다.
민서는 보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다.(지금도 충분히 어리지만) 엄마는 보나를 보며 민서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모습이 꼭 닮았다는 것이다. 민서 스스로도 생각해 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은 지금처럼 우중충 하고 어둡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변에 자신을 예뻐하는 어른들도 한 두어 명쯤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엔 친구도 꽤나 많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민서는 보나를 품에 안고 벌러덩 드러누워 눈을 꼭 감았다.
그날은 햇살이 좋았다. 갓 중학교에 입학했고 초등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홀로 다른 중학교에 왔지만 금세 함께 어울리는 무리도 생겼다. 겨우 4월이었고 모두들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교실엔 설렘이 가득했다. 전혀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게 없는 날들이었다.
그날도 민서는 평소처럼 등교했고 자신의 반에 도착해 책상을 바라보고는 충격을 받아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책상에는 온갖 낙서가 되어있었다. 통통했던 민서를 기괴하게 그려놓은 낙서, 민서를 향한 온갖 욕.
'더러워' '역겨워' '죽어라' '돼지' '냄새나'
형형 색색의 볼펜과 매직으로 책상이 온통 낙서 투성이었다. 처음엔 '누가 그랬지?', '내가 뭘 잘못했지?' 같은 것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누구의 소행인지 금세 드러났다. 평소 어울리던 무리의 아이들이 저 멀리 떨어져 무리의 중심이 되는 아이들 둘러싸고 민서를 보며 키득 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짓이 틀림없었다. 누가 한 짓인지는 감을 잡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과 특별한 마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민서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나쁘게 한 일도 없었다. 민서는 앞으로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무리에서 튀는 행동을 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이었다.
민서는 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곧 조회 시간이 되었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지만 민서는 선생님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할 뿐이었다. 아랫배가 조여 오고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선생님께 말을 하면 저 아이들을 혼내주실지 고민도 해봤지만 그건 오히려 일을 더 키우는 일 같았다.
그때 민서의 귓가에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책상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니? 다 지워라."
키득키득.
선생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서는 절망감 같은 걸 느꼈다. 가슴이 쿵쾅거려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은 대답이 없는 민서를 빤히 바라보다 조회를 마치고는 나가버렸다. 선생님은 분명 책상에 쓰인 낙서의 내용을 보았을 텐데 그것에 대해선 일언반구 한마디도 없고, 그저 책상이 지저분하니 지우라는 말뿐이었다.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멀리서 자신을 보며 웃는 한때 같이 다닌 무리의 아이들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민서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으며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 책상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지우개질을 할 수록 잉크가 번져 책상은 더욱 지저분해졌다. 아세톤을 가져와야겠다고 민서는 생각했다.
다음 날, 민서는 엄마의 화장대에서 몰래 아세톤을 가지고 나와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9시까지만 가면 됐지만 민서는 늘 8시 30분까지 학교에 도착했다. 미리 일찍 도착해 잠시 혼자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도 민서는 일찍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도착해 자신의 책상을 본 민서는 또 한 번 허탈함을 느꼈다. 지우개로 마구 문질러 더러워진 책상에 어제와는 다른 또 다른 낙서가 생겨있었다.
'죽어라' '지우지 마 돼지년아'
내용은 다소 유치했지만 민서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만한 문구들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모습을 기괴하고 못생기게 그린 낙서는 볼 수록 기분이 나빴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서 혼자 뿐이었다. 그 무리 아이들의 가방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민서는 그들이 다른 의미로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둘둘 말아와 책상에 아무렇게나 아세톤을 뿌리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지우개보다 깔끔하게 지워졌지만 아세톤의 냄새가 지독했다. 괜스레 눈물이 났다. 아무리 자신이 낙서를 지우더라도 그 무리는 매일 민서의 책상에 낙서를 할 것이다. 그녀는 매일 자신에게 향하는 욕과 기괴한 낙서들을 지워야 할 것이다.
애써 눈물을 참은 민서는 옷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창문을 열었다.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으니 아이들이 하나둘씩 도착했고 그 무리도 이내 도착했다. 무리 중 한 명이 민서의 깨끗해진 책상을 보고는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왜 지웠어? 지우지 말랬잖아. 우리가 그림 예쁘게 그려준 건데"
민서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애는 배윤희라는 이름으로 키가 크고 무리의 리더 격인 장진선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이였다. 큰 키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겁을 먹었지만 민서는 용기 내서 말했다.
"선생님이 지우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 책상에 낙서하지 마"
"뭐래" 윤희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민서의 가방을 뒤져 네임펜 하나를 꺼내더니 크게 '돼지년'이라고 적고 책상에 침을 탁 뱉고는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민서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도와주러 온다거나 민서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거 조금 힐끔거리다가 상황이 끝난 것 같으니 다시 각자 할 일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