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술은 가위다

해맑금주(金作)135일째

by 샤인진

걱정과 근심을 잘라버린다. 그리고...

세상과의 기억도 잘라버린다.


명절.

사랑하는 부모님 집에 왔다. 친할머니도 함께 있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다. 상태가 좀 더 안 좋아졌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거의 100세를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첫인사

"아고고...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할머니 잘 지냈어? 우리 할머니 여전히 예쁘네"

"자고 갈 거야? 밥 먹었어? 집에 맛있는 거 많아 얼른 가서 먹어.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혼자 왔어? 할머니는 그냥 이러고 산다. 죽지 못해 산다. 다 귀찮아. 운전하고 왔어?" 쉼 없이 이야기하고 질문하신다.

"술이 먹고 싶어 근데 네 엄마가 못 먹게 해. 요즘은 술친구들이 집에 안 와." 엄마는 할머니에게 금주령을 내리신 듯했다.

"술이 그렇게 맛있어?"

대화 중 제일 초롱초롱하게 말씀하셨다. "응응! 그럼 맛있지"

할머니는 지금도 소주 한 두병은 거뜬히 드신다. 술을 좋아하셨고 지금도 변함없다.


보자기 푸르듯 짐을 정리하고 부엌으로 갔다.

엄마가 나물을 데쳐주면 나는 비닐장갑을 끼고 아삭아삭 먹기 좋게 숨 죽은 나물들을 조물조물 무쳤다. 손에 나물이 몽글하게 만져지는 느낌이 좋았다.

"간장 넣고, 깨 넣어야 돼. 소금 여기 있다. 간을 봐봐. 설탕 조금 넣을래?"

엄마의 나물 분부를 따르며 함께 점심을 준비하는데 엄마랑 소꿉놀이 하는 기분이었다.


다리도 불편하신 할머니는 바닥에 손을 짚으면서 방에서 나오셨다. 그리고 조금씩 손을 밀며 엉덩이로 이동해 부엌으로 오셨다.

"애기들은 어쩌고 혼자 왔어?"

아마도 첫째 손녀 즉 언니로 나를 알아보신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 기억의 나무가 가위로 가지치기를 당하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애 너 엄마가 누구니?

당황했다. 이 상황이 낯설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엄마? 여기 옆에 있잖아요"

대답을 계속하지만 똑같이 되물으신다.

"엄마 없어?"

"어미야 얘 엄마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대화, 아니 말들이 날아왔다. 방패를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할머니의 말에 맞았다. 할머니와의 대화는 터널 같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긴 터널...


명절 전 주부터 양귀자님의 '모순' 책을 읽었다.

주인공 아버지도 매일 같이 술을 드셨다. 술에 취하면 난폭한 아빠로 역할이 바뀐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결국 모든 기억이 잘려 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딸에게 건넨 첫마디 '아가씨는 누구야?' 그리고 '배고파'

소설 속 아버지는 먹는 것에 집착이 강했다.



우리 할머니도 정말 잘 드신다. 아침. 점심, 저녁을 엄마가 한 끼도 거르지 않고 꼬박 챙겨주신다. 틀니 때문에 딱딱하고 많이 질긴 것만 빼면 못 드시는 음식이 없다.

누군가 음식을 먹고 있으면 "그게 뭐야?" 알고 있으면서도 물으시고 먹는 것에 집착이 강해지셨다.

세상과의 단절됨을 먹는 행위로라도 연결하려는 듯... 그것마저 없으면 세상과의 이음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음식집착의 끈을 강하게 움켜쥐고 계셨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할머니가 천국에 도착하면 할머니 나무의 100년 소중한 기억가지들이 되살아날까?

스스로의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예쁜 할머니. 천국에서는 소중한 기억들을 가지고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애틋한 마음이 번진다. 오늘처럼 엄마와 소꿉장난하듯 만든 점심. 사소함에도 행복의 무게가 실린다.


삶의 일부인 걱정과 근심을 매일매일 술로 자른다. 삶의 일부분이 잘리고 계속 잘린다.

돌아보니 삶이 통째로 잘렸다.

그렇게 '술은 가위 같다' 생각 든 하루였다.


해맑금주(황금金창조주作)- 삶을 해맑게 황금으로 만들기.








keyword
이전 19화1차, 2차, 3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