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하늘나라는 얼마나 멀어?"
꽃들이 봄의 기운을 왈칵 쏟아내며 앞다퉈 꽃망울을 피워내던 4월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퉁실퉁실 탐스럽다 못해 복스러울 정도로 만개한 벚꽃에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이 맑게 개인 하늘까지.
완벽한 날씨 덕분에 봄이 절정에 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날,
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할머니의 부고를 듣게 되었다.
올해 딱 100세를 채우신 할머니는 내 어렸을 적, 엄마나 다름없던 분이셨다.
한 집에서 살면서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할머니와 함께 잠을 자던 날들, 할머니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녔던 일 등 어쩌면 엄마와 함께 한 기억보다 할머니와 함께 한 기억들이 더 많았다.
유치원생이던 나는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며 무럭무럭 커갔지만
내 기억 저 편에서부터 연로하셨던 할머니는 내가 크는 동안 서서히 져가고 계셨다.
최근 몇 년간은 거동이 힘들어지셨고 몇 달 전부터는 말씀조차 하시지 못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곧았던 정신만큼은 여전히 놓지 않으셔서
찾아뵐 때마다 내 손을 꼭 잡은 채 우리를 지그시 바라보시곤 했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애틋하셔서 베갯잇 속에 만원씩 넣어두셨다가 아이들이 갈 때마다 손에 쥐어주셨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간식, 요구르트도 아이들에게 내어주시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할머니의 진심을 느꼈는지 첫째 아이는 할머니를 낯설어하지 않고
"왕할머니 집에 가자. 왕할머니 못 걸어서 불쌍하다."
하며 할머니에 대한 친근감과 연민을 표현해 왔었다.
할머니는 정말이지 내게 각별한 존재였다.
"엄마 왜 그래?"
나의 달라진 낯빛에 아이가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왕할머니가 돌아가셨대. 하늘나라에 가셔서 이제 다시 못 봐."
나의 부모가 어린 나에게 했던 대로 '하늘나라'란 말을 빌려 아이에게 할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왕할머니 못 걷는데 어떻게 갔어? 나도 하늘나라 가보고 싶다. 하늘나라는 얼마나 멀어?"
대답할 틈 없이 쏟아내는 아이의 질문이 너무나 순수하고 맑아서 마음이 더 저릿했다.
아이의 말처럼 삶과 죽음의 거리가 물리적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향하는 길에는 벚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흩날렸다.
아직 죽음과 이별을 실감하지 못하는 아이는 소풍을 가는 냥 해맑은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순간 오래전에 봤던 영화 '축제'(임권택 감독, 1996)가 떠올랐다.
안성기 배우 주연의 이 영화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 모습을 담고 있다. 주인공(안성기 분)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어린 딸을 데리고 고향집으로 향한다. 영화 속 그날도 꼭 오늘처럼 벚꽃이 내렸는데... 영화 속 장면이 오버랩되며 천진한 나의 딸이 영화 속 주인공의 딸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이 어린 딸에게
"할머니는 너희들에게 키를 나눠주시고 이제 돌아가신 거야." 라며 할머니의 죽음을 알려주던 것도 떠올랐다.
나는... 과연 아이에게 죽음에 관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첫째 아이보다도 더 어렸을 적에 죽음과 이별을 경험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가족, 아빠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 '죽음'은 항상 두렵고 무겁고 아픈 것이었다. 우리 가족을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슬픔 탓에 '죽음'은 우리 집에서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단어였다. 어린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죽음을 의식하며 지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할 수도 없었다. 힘들게 나를 돌봐주시는 엄마를 울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겨를도, 기회도 갖지 못한 나는 그 슬픔을 오롯이 감당해내야 했다.
내 아이는 달랐으면 좋겠다.
인생의 끝을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내 아이가 경험하게 될 죽음과 이별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으나 아이에게만큼은 '죽음'이라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순간에 와르르 찾아오지 않길 바란다.
아이와 죽음과 이별에 관해 충분히 사색하고 차근차근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가 성장과정에 맞춰 죽음을 서서히 알아가고,
그래서 후에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해도
겸허히 그 슬픔을 감당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축제'의 포스터를 보면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환히 웃고 있다.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일 텐데 웃고 있다니.
영화 제목이 '축제'인 것부터도 이상하다. 죽음이 정말 축제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듯 이생의 끝에 또 다른 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보면 어떨까.
아이도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접근해 가면 어떨까.
아이에게 죽음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곳만 가게 하고 싶지만
이 곳에 난 이상 당연히 겪어야만 하는 고난이 있다. 죽음도 그중 하나일 터.
그러나 만 4세 인생에 아직 이별이라야 같은 반 친구와의 헤어짐이 전부인 아이에게
벌써 죽음의 민낯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지금은 그저
언제나 올려다보면 마주할 수 있는 하늘나라로,
걸어가기엔 너무 멀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러나 언제든 너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렇게 알려주면서
나 또한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가 언제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