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시인과 촌장, '푸른 돛' (1986)

by Charles Walker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엉겅퀴 꽃씨가 저리도 날리니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어
친구, 다시 꿈을 꿔야 할까 봐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솜처럼 지친 모습들
하지만 저 파도는 저리 드높으니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 봐

시인과 촌장, '푸른 돛' 가사 전문



평소 즐겨 듣지 않던 곡이 문득 마음을 관통할 때가 있다. 하긴, 삶에 무언가가 끼어들 틈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만큼 바쁘고 분주할 때는 그 어떤 좋은 음악도, 어떤 좋은 책도 마음에 자리하지 못한다. 그럴 땐 앞뒤 재지 말고 일단 쉬어야 한다. 삶에 쉼표가 주어진 순간, 내 마음에 처음으로 문을 두드린 노래가 바로 이 곡, '푸른 돛'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덜컥 내 손을 잡지도, 내 어깨를 토닥이지도 않은 채 그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방 한켠에 다소곳이 앉았다. 나처럼 그 또한 꽤나 지쳐 보였다. 나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그도 함께 피울 수 있도록 창문을 열었고, 그는 고맙다는 눈인사를 내게 건네며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리곤 연기에 말을 실어 허공에 내뿜었다.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게 말이다. 세찬 바람을 맞고 있을 때, 그 속에 있으면 그걸 잘 못 느낀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며 힘들어도 버티려고 애를 쓴다. '엉겅퀴 꽃씨가 날려' 가끔 뺨을 때리기도 하고, 세찬 맞바람에 그만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이어서 '우린 너무 숨차게 살아왔'다고 말하며 그 자신과 나를 가만히 연대한다. '우리'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인 그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또 연민한다.

세파로부터 먼저 도망쳐온 나를, 그는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결정을 인정하고, '다시 꿈을 꿔야 할까 봐'라고 조심스레 읊조린다. 참 그다운 어투이다. '꿈을 꿔라'도, '꿈을 꾸자'도 아닌, '꿈을 꿔야 할까 봐'라니. 그의 말은 저만치 먼곳에서 뒷걸음질치고 있다. 입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혹여 청자인 내게 닿을까봐 주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모두 억척스럽게도 살아왔어


이제 그가 사유하고자 하는 대상은 그 자신과 나를 넘어 '모두'가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억척스럽게' 살아왔다고 그는 말한다. 사전에 '억척스럽다'를 찾아보면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몹시 모질고 끈덕지게 일을 해 나가는 태도가 있다(출처 표준국어대사전).'라고 등재되어 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거센 파도를 타며 우리는 휘청이거나 넘어지지 않고 모질고 끈덕지게 버텨왔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 있다. 비록 '솜처럼 지쳐' 나처럼 방구석에 처박혀 있더라도, 일단 내가 살아 있음에 그는 안도하는 듯하다.

그는 이내 눈을 돌려 창문 너머 세상을 본다. 나의 시선도 저절로 그를 따른다. '드높은 파도'가 여전히 몰아치는 세상을 보며 그는 내게 말한다. '아무래도 친구, 푸른 돛을 올려야 할까 봐'. 여전히 조심스러운 말투지만, 대상이 명확하다. 나를 '친구'라고 부르는 그는 '푸른 돛'을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드시 올려야 한다기보단, 올리는 편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뉘앙스이다. 그의 말은 시종일관 신중하다. 세상 풍파에 상처입고 지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뒷걸음질에 가깝지만,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로부터 나는 큰 위로를 받는다. 그는 짧은 눈인사를 남기고, 담배를 비겨 끈 뒤 방문을 슬며시 닫고 나간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생각한다. 내가 올려야 할 '푸른 돛'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있기는 한가? 있다면 어떤 상태인가? 이미 이리저리 찢어지고 남루하여 못 쓰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뇌리를 계속 맴돈다. 아무래도 어느 구석엔가 내던져져 있을 나의 '푸른 돛'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돛을 올리고 어쨌든 계속 나아가야 할 테니까. 살아 있는 한, 나의 항해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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