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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청소년 시절을 함께해 준 명가수

by Charles Walker
왼쪽부터 거미 정규 3집(2005), 언플러그드 스페셜 앨범(2006), 정규 2집(2004), 정규 1집(2003)

내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시기가 2002년이었는데, 그때가 휘성이 막 데뷔했을 때였다. 휘성이 가요계에 파격적인 모습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의 보컬 트레이닝을 도맡았던 실력파 여성 보컬리스트가 데뷔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그리고 그해, YG 패밀리가 정규 2집을 발표했을 때 그 보컬리스트가 알리샤 키스(Alicia Keys)의 명곡 'Fallin'을 커버해서 맨 마지막 트랙에 수록하였다. 그때는 본명인 '박지연'을 사용하였지만.


그 한 곡으로 이미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난 이렇게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이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보컬이 있었던가? 어떻게 흑인보다도 더 흑인처럼 부를 수 있지?' 충격에 휩싸였다. 흑인음악은 흑인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자 가수의 경우 이미 나얼, 휘성, 김범수가 있었고 여자 가수는 박정현, 박화요비가 있었다. 그런데 박지연은 기존의 모든 보컬리스트와도 결을 달리하였다. 밀도 높은 소리를 사용하지만 그 안에 섬세함이 있고, 성량이 크지만 억지 감성으로 쥐어짜지도 않는다. 그렇게 박지연은 2003년, '거미'라는 이름으로 가요계에 등장하게 된다. 데뷔곡은 이현정 작곡의 '그대 돌아오면'.


사실 거미의 활동 시기 중에서 내가 가장 마음 아팠던 때가 바로 이 데뷔 시절이다. 이때 마침 성대결절에 걸려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거 주사까지 맞아가며 라이브를 고수하고 동료 가수들과 함께 한 합동 콘서트까지 그 상태로 강행하는 모습을 보고 '차라리 립싱크를 하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본래 실력이 그렇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목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다. 라이브 무대 때마다 힘겹게 갈라지는 목소리와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는 걸 느꼈다. 저렇게까지 라이브를 고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가수로 하여금 저 정도의 의지를 갖게 만든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거미의 성대결절 라이브 투혼에 많이 움직였던 모양이다. 데뷔 앨범 '그대 돌아오면'과 후속곡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까지 모두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위태롭던 데뷔 앨범 활동을 힘겹게 마무리하고, 이듬해 발표한 2집 '기억상실'이 완전히 대박을 터뜨렸다. 전화위복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기억상실'은 김도훈이 작곡한 알리샤 키스 풍의 정통 R&B 곡으로, 거미가 아닌 다른 가수는 아예 소화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미의 개성을 잔뜩 불어넣은 곡이다. 거미라는 가수가 가진 장점인 폭발적인 성량, 섬세한 기교, 애절한 감성의 삼박자를 이 한 곡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마마 이영현이 작곡한 후속곡 '날 그만 잊어요'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5년, 거미는 '아니'를 타이틀곡으로 정규 3집을 발표하지만 정작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곡은 블루스 풍의 '어른아이'였다. 언뜻 한영애의 뉘앙스가 내비치는 것 같은 곡으로, 사랑을 쉽게 생각하는 나쁜 남자에게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여성의 애환을 그린 노랫말도 인상적이다. 그 다음 해인 2006년에는 기존에 발표했던 세 장의 정규 앨범들의 곡들 중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들을 모아 언플러그드 스페셜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 앨범이 정말 물건이다.


일종의 베스트 앨범이라고 보면 될 텐데, 베스트 앨범이 그저 기존의 곡들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짜깁기해 놓은 앨범이라고 한다면 이 언플러그드 앨범은 기존 곡들을 '언플러그드 세션'으로 재편곡해서 수록한 것이다. 언플러그드 세션이란 말 그대로 전기 플러그를 제거한다는 뜻으로, 리얼 악기로 이루어진 밴드 사운드로 편곡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기존 곡보다 훨씬 빈티지하고 따뜻한 질감의 사운드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앨범은 몰라도 이 앨범만큼은 사람들이 많이 좀 들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의 거미 덕질은 이 앨범에서 사실 멈췄다. 4집 '미안해요'에서 실망을 좀 많이 해 버려서... '아, 이 사람 덕질은 여기서 관둬야 하나보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게다가 그때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는데, 그때는 엉뚱하게도 '비바소울', '하우스룰즈', '클래지콰이', '프리템포' 같은 도회적인 느낌의 하우스나 일렉트로닉 음악에 빠지게 되어버려서 말이다... 이런 아티스트들을 함께 듣던 동기들도 있었는데, 아마 군대 때 얘기를 하게 될 날도 곧 오게 될 것이니 오늘은 이쯤에서 줄인다.


여담이지만, 휘성과 거미가 사제지간이었다고 전술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 휘성의 노래를 빠르게 재생하면 거미의 목소리가 나오고, 거미의 목소리를 느리게 재생하면 휘성의 목소리가 나온다고 하며 목소리 유사도가 70퍼센트 이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무리 사제지간이라지만 음색이 비슷하기란, 그것도 남성과 여성이 그러기란 쉽지 않을 텐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오랜 시간 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동료를 그렇게 잃고, 한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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