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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

록 흉내만 내는 '가짜'들을 향한 조용한 일갈

by Charles Walker
스크린샷 2025-09-16 095017.png 왼쪽부터 정규 2집 (2011), 정규 3집 (2017), 정규 5집 (2022), 정규 1집 (2010)

검정치마는 '조휴일'이라는 뮤지션의 1인 밴드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가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해외 얼터너티브 록 음악과 거의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아마 조휴일 자신이 외국 생활을 오래 하며 그곳의 문화를 피부로, 온 감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저 외국 밴드들의 사운드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따라할 수 있느냐를 바라보며 연습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한국의 뭇 밴드들과는 그 차원 자체가 이미 다른 것이다.


듣다 보면 언뜻 오아시스(Oasis)도 스쳐가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li Peppers) 같은 느낌도 난다. 서정적인 곡을 할 때면 더 스크립트(The Script) 같은 아이리쉬 밴드의 느낌마저도 풍긴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누가, 어떻게,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에 따라 아웃풋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휴일이라는 필터가 얼마나 성능이 뛰어났길래 이런 깊이 있는 음악들이 연이어 나올 수 있는 걸까?


정규 1집 [201]은 원래 2008년에 초판이 발매되었으나, 몇 개의 트랙을 좀 더 추가하고 앨범 커버를 바꾼 뒤 2010년에 스페셜 에디션으로 재발매되었다. '날 좋아해줘, 아무런 조건 없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1번 트랙 '좋아해줘'부터 압도적이다. 이렇게 직설적이면서도 솔직한 노랫말이 또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혹은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지레 겁먹고 못하는 말을 조휴일은 도발적인 보컬로 내질러버린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속절없이 이끌릴 수밖에.


1번 트랙에서부터 이미 검정치마의 음악에 마음을 내주기로 결정했다면 이제부턴 어쩔 수 없다. 노랫말에 영어가 많아서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다면 기깔나는 사운드에 몸을 맡기면 되고, 또 다른 곡에서 어떤 노랫말에 꽂히면 그 마음에 공감하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 된다. 검정치마의 음악은 그렇게 즐기면 좋을 것이다. 1집에서의 좋았던 노랫말을 몇 가지 소개해 본다.


"시간은 스물아홉에서 정지할 거야"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 오 나도 알고 있지만 내가 열아홉 살 때도 난 스무 살이 되고 싶진 않았어 ('강아지' 중에서)


낯 익은 거리들이 거울처럼 반짝여도,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Antifreeze' 중에서)


2집 앨범 [Don't You Worry (I'm Only Swimming)]은 바다의 흥취를 슬쩍 묻혀 놓았는데, 그게 또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 웨스트코스트 해변에서 듣는 컨트리 음악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이별노래'로 앨범의 포문을 여는데 1집에서의 꽉 찬 밴드 사운드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1집과 2집 두 장의 앨범만으로 조휴일은 록은 물론 컨트리까지 '빠다' 느낌을 제대로 소화해 내는 뮤지션임을 제대로 증명해 냈다.


1집이 직선적이고 다소 도발적인 표현들이 많았다면, 2집은 사운드가 마치 파도 치는 것처럼 너울지는 듯하고 노랫말이나 창법 등 음악적 표현도 아련한 느낌이 짙게 묻어난다. 두 장의 앨범 속 주인공이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이즈음 래퍼 버벌진트(Verbal Jint)의 4집 [Go Easy]의 타이틀곡인 '좋아보여'(알다시피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에 보컬 피쳐링을 하면서 힙합에까지 녹아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니, 도대체 이 사람 역량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싶다. 아련미 돋는 노랫말 하나 내놓아 본다.


내일이면 나를 버릴 사람들 걱정하는게 아니에요

내일이면 난 다시 바다 건너에 홀로 남을 그대는 괜찮나요

내 귓가에 노래를 불러 넣어줘요 다른 새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유일했던 사랑을 두고 가는 내게 숨겨뒀던 손수건을 흔들어줘요 ('Love Shine' 중에서)


오랜 공백 끝에 발표한 정규 3집 [Team Baby]도 그 시절 꽤나 자주 들었던 앨범이다. 2집에서 컨트리라는 장르적 문법으로 아련한 감성을 자아냈다면, 3집은 사운드보다 노랫말에 좀 더 집중해서 작업한 듯한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마음에 훨씬 더 잘 다가오는 듯한 느낌은 나만 그런 걸까? 앨범의 타이틀곡은 '나랑 아니면'이었지만, 이 앨범에서 내가 제일 좋아한 곡은 '폭죽과 풍선들'이었다. 검정치마 음악에서 아마 최초로 색소폰이 들어간 걸로 아는데, 검정치마답지 않게 몽글몽글한 반주도 귀여웠고, 노랫말도 좋았다.


항상 나는 너무 쉽게 버림받곤 해 잠시 손만 놔도 날아가 버리고 하지만 괜찮아 새로울 것도 없잖아

it’s you and me and no one else oh baby, 내 노래가 멈춘 뒤엔 모두 떠나가고 또 너와 나 둘만 남겠지 ('폭죽과 풍선들' 중에서)


정규 4집 [Thirsty]는 그 이듬해 발매된 것으로 아는데, 불편한 표현들이 많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면에 다루지도 못했다. 표현은 아티스트 본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함부로 이렇다저렇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그 앨범은 내겐 좀... 버거웠다. 그렇게 검정치마 덕질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2022년, 무려 18트랙이나 수록된 정규 5집 [Teen Troubles]가 발표되고, 나는 외쳤다. '검정치마가 돌아왔구나!' 이 앨범에는 검정치마 특유의 염세적이면서도 자조적인 감성이 물씬 풍겨오고, 사운드도 좀 더 음울하고 헤비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4집에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나를 5집이 다시 데려다놓을 정도로 어쨌든 검정치마는 음악을 잘한다.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실망감을 줄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도 믿는다. 변명하지 않고, 핑계를 늘어놓지 않고 검정치마는 새로운 음악을 내놓음으로써 그 실망감을 만회할 것임을. 그래서 결국엔 믿고 듣는 뮤지션으로 대중에게 자리매김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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