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조르즈 성과 국립 판테온
리스본 알파마 지구 언덕 꼭대기에는 상 조르즈 성(Castelo de São Jorge)이 우뚝 서 있다. 11세기 무어인들이 쌓은 요새는 포르투갈 초대 왕 아폰수 1세가 탈환해 왕궁으로 사용했으며, 1755년 대지진으로 큰 부분이 무너졌다. 지금은 성벽과 일부 공간만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천 년 가까운 리스본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성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었고, 도시의 기억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이었다. 돌계단과 골목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고, 색이 바랜 집들은 오래된 온기를 품은 채 길을 지켰다. 현지인의 느린 일상과 작은 대화, 골목 사이 스며드는 햇살 속에서 어느새 나의 걸음도 속도를 늦추었다.
성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오래된 성벽이 둘러서 있었고, 낮게 드리운 소나무 그림자가 깊게 흔들렸다. 그 아래서 사람들은 서두름 없이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성벽 위를 천천히 걸을 때, 마치 도시의 박동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벽에 오르니 리스본이 한눈에 펼쳐졌다. 미로 같은 알파마 지구의 골목부터 코메르시우 광장, 아우구스타 거리, 강 건너 알마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지도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지붕들의 결은 따뜻하고 단단하게 이어져 있었고, 테주 강 위로 부는 바람은 도시의 이야기를 속삭이듯 지나갔다. 그 순간,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었다. 시선과 숨결이 그대로 도시와 겹쳐지며 평온함이 스며들었다.
성 안의 공기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덕 가장자리에 선 요새는 언제나 바람을 먼저 맞이한다. 그 바람은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마치 오랜 기억을 전해주는 존재처럼 다가왔다. 발밑의 돌길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발길에 닳아 반들거리는 돌이 있는가 하면, 거친 면을 그대로 드러내며 버티는 돌도 있었다. 그 다양함이야말로 리스본이 수백 년을 견뎌낸 방식이었다.
망루에 서니 다시 한번 숨이 멎는 풍경이 펼쳐졌다. 알파마의 지붕과 흰 판테온 돔,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테주 강까지. 나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단순히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리듬 속에 몸을 잠시 눕혀 두는 경험이었다.
내부 정원은 한결 사소하고 친근한 풍경을 품고 있었다. 듬성듬성 자란 올리브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고, 아이들은 성벽 사이를 뛰놀며 웃음을 퍼뜨렸다. 새들이 붉은 성벽 위로 날아다니는 장면까지 하나의 정지된 그림 같았다. 작은 전시실에는 항아리나 도기 같은 소박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왕이나 전쟁의 기록이 아니라, 평범한 삶의 흔적이었다. 역사를 오래 붙드는 힘이 결국 이런 일상성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마음에 남았다.
성문을 나서며 깨달았다. 상 조르즈 성은 도시를 단지 "내려다보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리스본의 결 위로 자신의 존재를 겹쳐 놓는 자리였다. 성벽과 바람, 돌과 사람, 그리고 그 너머의 풍경은 모두 이 도시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해 질 녘, 테주강 위로 번져 가는 노을과 정원 사이를 여유롭게 건너 다니는 공작새까지. 이 성은 지금도 도시의 가장 깊은 얼굴을 보여주는 특별한 무대였다.
알파마 지구, 테주 강변 가까이 언덕 위로 국립 판테온(Panteão Nacional)의 거대한 돔이 솟아 있다. 오렌지색 지붕들 사이에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원래 17세기에 세워지기 시작한 산타 엥그라시아 교회로, 무려 280년간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가 20세기 중반 마침내 완공되며, 포르투갈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는 국가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간과 역사가 교차하는 특별한 장소다.
정면에 서니 압도적인 웅장함에 잠시 숨이 멎었다. 흰 대리석 파사드와 코린트식 기둥은 고대 로마 신전을 연상시키고, 하늘로 솟은 돔은 리스본의 스카이라인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차갑고 위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가까이 다가서니 섬세한 부조와 문양들이 단단한 외관 속에 감춰진 예술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외벽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들은 건물이 짊어진 세기의 무게를 증언하는 듯했다.
두꺼운 문을 밀고 들어서니 빛과 그림자의 성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의 원형 홀은 높은 돔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가득 차 있고, 하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은은하게 퍼졌다. 공간 전체는 마치 거대한 숨결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으로 채워져 있었고, 우리는 거의 모두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홀을 따라 자리한 묘와 기념비는 포르투갈 역사의 거인들을 기리고 있었다. 그들의 묘는 화려하기보다 절제된 품격으로 조성되어,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주었다. 항해왕 엔히크, 바스코 다 가마,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 파두의 여왕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어떤 이들은 상징적인 위패만 남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이들이 남긴 족적이 얼마나 큰지 확연히 드러났다. 이 앞에 서면 개인의 삶을 넘어 한 나라를 형성한 의지와 정신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판테온의 절정은 돔 위 테라스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좁은 계단을 따라 오르면, 리스본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지붕들, 빛나는 테주 강, 거대한 4월 25일 다리, 멀리까지 이어진 도시의 선율 같은 풍경. 왼편으로는 상 비센트 드 포라 수도원의 두 첨탑이 또렷이 솟아 있고, 발아래로는 알파마 골목의 빽빽하면서도 아름다운 결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일곱 언덕의 도시’라는 별명이 새삼 실감됐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며 전해준 것은 단순한 탁 트인 시야가 아니라, 이 도시가 품은 역사의 두께였다.
판테온을 나올 때, 나는 단순히 한 건축물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을 지나온 듯한 기분에 잠겼다. 한 시대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국민적 자부심이 응집된 공간이자,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교차점이었다. 돔 위에서 내려다본 장대한 풍경, 홀에 서려 있던 숭고한 정적,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위대한 울림을 주는 인물들의 흔적이 모두 어우러져 긴 여운을 남겼다.
알파마 골목으로 내려서는 길은 다시 일상의 리듬으로 돌아오는 과정 같았다. 낮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파두의 한 소절, 고요하지만 살아 있는 풍경. 판테온의 경험은 여행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시간의 한 단면을 지나온 듯한 감각으로 내 안에 깊숙이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