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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 못하는 사람

(4) 나의 말을 곱씹어보다

by 박지아

“시간이 있으니까 도마뱀 35마리를 키우겠죠……. 쥐라기월드 운영하는 거 아녜요.”


“9시까지 야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10시잖아요. 애들 밥 주는 날이어도 30분 걸리고, 귀뚜라미 주는 날은 1시간 걸려요. 그래도 잠자는 시간인 12시까지는 한 시간이 남는데, 도마뱀 키울 시간이 없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당황해서 줄줄 설명했다가, 3초 후 입을 막았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공격적이었던 것 같아요.


35마리 도마뱀을 키울 시간이 되냐는 직장동료의 질문이 저로서는 영 이상하게 느껴졌던 거예요. 당연히 시간이 없으면 키우지 않겠죠.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싶어서 당황해서 자기변호를 했던 건데, 딱 3초 뒤에는 후회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을 수도 있는데. 내가 꼬아서 들었구나. 그냥 평범한 일상적 대화였는데, 나는 또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구구절절 설명헀구나.


말은 일단 뱉어놓고, 늘 깨달음이 늦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랑 대화하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하나 봅니다.


그렇게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귀가합니다.


나는 왜 이러나, 말을 정말 못 하는 것 같아, 입을 영영 닫아야겠다. 그런 생각.



하루의 대화에
점수를 매기는 버릇


저는 제가 뱉은 말이나, 타인과 나눈 대화를 하루 종일 곱씹어 보는 버릇이 있어요.


바둑으로 치면, 복기(復棋)한다고 하지요.


대화의 시작부터 시작해서, 분위기, 상대의 말속에 숨은 의미, 표정, 제스처, 그의 기분, 억양, 뉘앙스, 그런 걸 다시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대한 제 반응이 ‘괜찮았는지’ 돌이켜보며 점수를 매깁니다.


점수가 좋은 적은 별로 없어요.


아, 상대의 그 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으니까, 이런 답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그런 눈빛이었는데, 내 단어 선택에 실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 결론은 늘 ‘입을 다물자’가 됩니다. 헛소리를 할 바에야 말을 아예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자, 그런 척을 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일은 없지요.


또, 또, 상황이 되면 입방정을 떨지요.


말을 뱉어놓고 3초 후에 후회합니다. 이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또 장황한 변호를 늘어놓다가 다시 아차 합니다. 그리고 다시 대화 내용 분석 후 자괴감에 빠지는 일의 연속. 가끔은 좀 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을 뱉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자기 말을 곱씹는 걸까요?


제 자신의 이미지를 너무 신경 쓰는 걸까요?


대화에서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강박이, 저에게 있는 걸까요?


참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말 못 함’의 역사


대화를 잘 못하는 건, 지금의 일만은 아니에요.


이미 중학생 때부터, 또래들과 대화에 문제가 있었어요. 잘 어울리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저는 학우들이 뭘 좋아하는지, 대화 주제가 무엇인지, 전혀 감을 못 잡았어요.


저와 그들의 관심사가 크게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뉴에이지 음악이나 라즈니쉬, 기독교 음모론 같은 것들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죠. 그 시절만의 절절하고 오글거리는 열정이 있었어요.


이런 오타쿠니까, 평범한 또래와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죠.


이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한참 또래와 대화하고 소통해야 할 나이에, 너무 자기 세계에 빠졌나 봅니다. 남들과 대화 자체를 나눠 본 경험이 적으니, 성장해서도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눈치를 보는 것도 느리고.


나이가 들어서, 사회생활 초년생 시절 강제로 주입된 사회성 덕분에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관심사 문제는 변하지 않았어요.


또래의 여자들이 결혼이나, 육아나, 연애 이야기를 할 때면 끼어들 틈이 없었죠. 저는 모태솔로니까, 무슨 말로 끼어들겠어요. 그냥 멍청한 얼굴로 “아” “음” “허”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대화에서 빠져나오기 일쑤였죠.


사람들과 섞이려 노력했지만, 늘 어딘가 비켜나 있었죠. 그래서일까요, 어느 순간 말 없는 생물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마뱀에 빠졌던 걸 수도 있어요.


말없이 조용하고, 약간은 어벙하고, 느려터진 생명체.


이 통통한 꼬리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노력을 안 한 건 아닌데
어딘가 어색해


대화하는 스킬을 향상하려는 노력도 부단히 해 봤어요.


책을 달달 외운 후 친구들을 상대로 실습했죠. 근데, 이제 읽은 책의 종류가 문제였어요. 심리 상담 서적을 많이 읽었거든요. 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이 상담심리 책에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공감하는 척’,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방법’, ‘잘 듣는 방법’ 이런 능력만 좋아져서, 결론적으로 자기 이야기는 못하는 사람이 되었죠.


누가 질문을 하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저는 패닉에 빠집니다.


A를 설명하려면를 B를 설명해야 하고, B를 설명하려면 C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A, B, C의 배경에는 어마어마한 제 역사가 담겨 있죠.


이야기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순식간에 방대한 정보가 머리를 꽉 채우니까, 당연히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장황할 수밖에 없어요.


“도마뱀 35마리 키울 시간이 되나요?”


하는 단순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다 좔좔 털어놓았습니다. 12시에 잠을 자고 새벽 6시에 일어나고, 회사에 7시 반까지 출근하고, 야근을 하면 9시에 집에 들어가고, 도마뱀을 돌보는 시간은 30분 정도고, 씻는 시간 20분 잡고, 간단한 청소에는 10분이 걸리고, 그러고도 1시간이 남아서 글을 씁니다.


이 말을 다 하고 난 후 돌아서서 이마를 쳤지요.


아, 그냥.


“집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남아돌아요!”


라고 할걸!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던 게,
어쩌면 말을 못 하는 원인인지도 몰라

브런치 작가님이나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달변가가 있으실 수도 있고, 저처럼 말을 영 잘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루 종일 대화 내용을 복기하다 보면, 저도 머리가 너무 아파요. 그러니까 결론은 항상 ‘입을 다물자’, ‘말수를 줄이자’, ‘심플하게 생각하자’ 기타 등등. 물론 실천으로 이어지는 일은 잘 없지만요. 정작, 말은 잘 못하는데 말하는 건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요.


글 쓰는 건 연습하면 느는데, 춤도 추다 보면 느는데, 말하는 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38년간 입 밖으로 많은 단어를 내뱉었지만, 그중에 정녕 쓸모 있는 건 몇 마디나 될까 싶어요.


거짓말은 기본이고, 허투루 내뱉은 말, 모진 말, 못된 말, 비아냥거리거나 상대의 가슴을 아프게 한 말, 의미 없는 말, 내 자랑만 가득 담긴 말, 남을 질책하는 말, 아는 척하는 말, 변명하는 말, 주제넘은 말, 등등.


내가 쏟아낸 음성들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글쎄요.


저는 말을 잘못하는 사람이지만, 그럼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건 뭘까요?


어쩌면, 말을 잘한다는 건, 어쩌면 좋은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한 말, 상대를 배려하는 말, 따뜻한 말, 상처를 치유하는 말, 위로하는 말, 힘을 불어넣는 말, 사랑이 담긴 말, 상냥한 말, 상대에게 공감하는 말,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말, 진정성이 담긴 말.


말이란 건 마음이 담겨야 하는 거니까.


어쩌면 내가 한 수많은 말실수들은, 진심 어린 마음이 담기지 않고, 흉내만 내려고 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면 말을 잘 못하는 건, 대화 상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궁금했던 게 아니라,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진심보다 기술이 먼저 나왔고, 그게 자꾸 말실수가 됐던 것 같아요.

우리의 말이 깊어지고
무르익기를 기원하며


혹시라도, 저 같은 사람이 또 계시다면.


말이 자꾸만 어긋나고, 말보다 후회가 먼저 떠오르고, 결국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해버리는 사람.


괜찮아요. 우리는 어쩔 수 없죠. 이럴 수도 있어요.


말을 잘 못하는 우리는, 어쩌면 조금 더 천천히 사랑하고, 조금 더 오래 듣고, 더 공부하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연습을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마디 말을 해도, 정녕 진정성 있는 말을 한다면,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겠지요.


그리고요, 그런 말들 중 하나가 지금 여기, 이 글일지도 모르겠네요.


말을 잘 못해 괴로웠던 어느 날, 도마뱀의 꼬리처럼 말랑하고 조심스럽게 꺼낸 문장들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천천히, 서툴게, 그러나 분명히 마음을 담아 전해보려 합니다.


이 말은,


괜찮다고.


말을 잘 못하는 당신도 나도, 괜찮다고요.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차츰 말이 깊어지고 무르익는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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