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에세이 투고에 성공했습니다.
저는 편집자로 10년을 일하면서,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책을 만들었어요. 평균 한 달에 두 권씩은 마감을 쳤으니, 백수시절을 빼도 100권 정도는 만든 셈이지요.
그런데, 이 중에 제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단 한 권도.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 판권에 책임편집으로 들어간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예요.
가끔 저자의 말에 '편집자 박지아'에 대한 감사인사가 들어갈 때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사려 깊은 저자에 한정된 거지요.
저는 책 뒤의 얼굴, 책에 숨은 사람, 책의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만족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저는 문예창작학 전공이에요. 심지어 석사까지 했죠. 소설을 썼어요. 마음 같아서는 신춘문예 등단도 하고, 문예지에 꼬박꼬박 글을 싣고 싶고, 인터넷 서점에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올리고 싶고.
그러니, 제가 남의 책을 만드는 10년간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아버지는 가끔 물으시더군요.
문예창작학과 석사까지 졸업한 딸에게, "네 책은 언제 나오니?"라고.
그런 책은 없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있어서 책은 늘 꿈이었죠.
책이라는 꿈. 꿈속의 책.
내 이름 석자 박힌 표지는 이 세상에 없는 책.
꿈속의 책이
나에게 왔습니다
사실은, 에세이 투고에 성공했어요.
원고를 여기저기 출판사에 투고했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감사할 노릇이지요. 많이 팔아야죠.
그리고, 운이 좋았죠.
저는 투고 성공한 사람을 출판사에서 일한 10년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그것도 심지어 에세이로, 100% 기획출판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그게 저예요.
인생이 실없는 농담 같죠.
브런치에 자비출판에 대한 글을 썼는데, 더 이상 진행을 못하고 있는 것도 이 까닭이에요. 자비출판 준비를 착착하고 있었는데, 기획출판을 하게 됐어요. 이걸 어떻게 브런치 작가님들이나 독자님들께 설명을 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묻어두고 있는 겁니다.
자비출판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제 돈으로 책 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자기 PR시대잖아요. 팔리든 안 팔리든, 내 이름 석 자 박힌 책을 낼 수 있는 겁니다. 오프라인 서점에 진열도 되고, 인터넷 서점 배너도 걸고, 한번 해보고 싶으면, 돈 모아서 하는 거죠.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기획출판은 좀 꿈이 벼락같이 이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뭔가 인정받았다는 기분도 들고.
좌우간 지금은 투고에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나죠. 어디 가서 당당하게 에세이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과년한 딸년 지금껏 키워 온 부모님께 눈곱만 한 위로라도 된 것 같고.
참, 인생은 이상합니다.
이놈의 인생이 제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어요.
삶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항상 나쁘게만 흘러갔죠. 애를 써서 붙잡아야 남들만큼 살 수 있었고, 아등바등 살아도 결과는 하찮기 일쑤였죠. 그런데, 이번엔 어쩌다가 잘 풀렸어요. 이런 날도 있다니.
책이라는 꿈이 목전에 왔어요.
꿈속의 책이 나에게 왔어요.
미지의 어둠 속으로,
해본 적 없는 모험 속으로
어제 책에 들어갈 마지막 꼭지를 탈고했어요.
퇴고는 해야겠지만, 저는 어지간해서는 퇴고로 글의 흐름을 크게 바꾸지 않기 때문에 문장만 정돈하면 마무리가 됩니다. 이번 주에는 출판사에 보낼 수 있지요.
공교롭게도 그 꼭지의 제목도 '책'입니다.
이 꼭지를 쓰기 위해서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아마, 제 나이만큼일 겁니다. 38년 정도.
아니, 비단 38년이 걸린 글이 그 글뿐이겠어요? 제가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글도 38년씩 묵은 글들이지요.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아 완성하는 데 이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세상 모든 글들이 그렇죠.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하필 인생에서 책을 붙잡은 걸까.
언제부터일까.
왜 책을 놓지 못하는 걸까.
웃기게도, 저는 사실 책에 얽힌 좋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인쇄하고 나면 뻑하면 오탈자가 보이고, 2도 컬러는 마음에 안 들고, 표지에 들어간 영어 스펠링이 하나 틀려 있고, 판권만 멀쩡하면 다행이고, 교정교열은 더럽게 못 보고, 맨날 부장님께 혼나고, 그러다가 정신과 신세를 지고, 자살하겠다 뭐다 쇼를 하고, 결국 먹고살 길이 없어서 또 책을 만들고.
뭐 그런 게 책에 대한 제 기억이죠.
그런데도 생업이라 버리지도 못하고 악착같이. 정말 지독하게 붙잡으면서 남의 책을 만들었는데, 이제 내 책이 나옵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책을 만들어 줍니다.
대학생 문청시절, 내 이름을 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겠다, 아니, 그냥 내 이름 석 자 박힌 책이 나오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신춘문예에 되었으면 좋겠다, 문예지로 등단했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자비출판으로라도 내 책을 만들면 좋겠다.
그렇게 모아 왔던 꿈의 파편들이, 그렇게 쌓아왔던 단어의 블록들이, 낱장 종이에 새겨져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내 삶을 지나, 손가락을 거쳐, 컴퓨터에서, 인쇄소에서.
아스라한 별처럼 보이던 책이.
여기 지금 내 눈앞에.
꿈이 내는 빛에 눈이 멀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몸을 싣습니다.
우주에서 모이고 또 부서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부딪치고 깨지고 쓰러지고 무너지는 인생 속에서 건져 올린 한 줄 한 줄이, 세상을 향해 조용히 한걸음을 내딛습니다.
미지의 어둠 속으로. 해본 적 없는 모험 속으로.
지금 여기,
신이 내 곁에 머물다 간 순간
독자님들은, 드라마 <도깨비>를 보셨는지요.
저는 드라마는 거의 안 봐서,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알게 된 드라마 속 이 대사는 참 좋아해요.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질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 떠밀어 준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간 순간이다."
이게 어떤 맥락에서 나온 대사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이 말이 부쩍 생각이 납니다.
내 인생에 그토록 불러도 답이 없었던 신이 머무는 것만 같아요.
그토록 돌을 던져도 잠잠하던 호수가, 드디어 잔물결을 일으켜 발목을 간지럽히는 것 같아요.
올해 초 3월, 처음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을 때. 무엇이건, 하다 못해 썩은 동아줄이건 부러진 나뭇가지건, 날카로운 돌부리건 손에 걸리는 대로 잡고 나아가야 했을 때. 갈 곳을 잃고 지구 위를 둥실둥실 떠다닐 때. 20대 문청부터 그토록 투고를 보냈어도 세상이 소리 한 점 없이 조용했을 때.
꿈이었던 책.
책이라는 꿈을 다시금 꿔봅니다.
내 책처럼 당신의 책도,
내 꿈처럼 당신의 꿈도
저는 떨리고, 조금은 겁도 납니다.
세상에 책 한 권 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 할 수도 있겠죠. 맞는 말입니다. 책은 매일같이 쏟아지고, 누군가는 서점의 먼지를 맞으며 사라지고, 또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종이 더미 속에 묻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내 책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지요.
내가 쓴 문장, 내가 살아낸 시간, 내가 씻어 말리고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 활자라는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는 건, 그건 누가 뭐래도 한 인간의 온 생애가, 어떤 형태로든 기록되는 일이니까요.
이건 어쩌면, 세상에서 내가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쪽팔릴까 봐 원고도 숨기고, 퇴고를 하다가 글을 아예 엎고, 누가 볼까 봐 브런치 서랍에 조용히 묻어놓고 그랬던 내가, 이제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누가 묻는다면 조심스럽게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요, 곧 책 냅니다.”
제 삶의 바닥을 긁고 긁어모은 조각들이 어느 날 반짝거리는 문장이 되어 돌아오는 그 기적, 그게 책이었고, 그게 꿈이었고, 그게 결국 저인 것 같습니다.
이제 원고는 마무리되었고, 퇴고를 남겨두었고, 인생의 다음 장이 펼쳐지기 직전입니다.
앞으로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을지는, 어떤 마음으로 닿을지는 모르지만,
그저 하나만 바랍니다.
내 책이 누군가의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되기를.
누군가 아주 힘든 어느 날, 책장을 넘기다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안심을 주는 문장을 만나길.
삶이 참 외롭고 어지럽다는 걸 알기에, 따뜻한 한 단어가 얼마나 큰 구원이 되는지를 알기에.
그 단어들이 당신 곁에 도착하길 바랍니다.
마치, 내 곁에 책이 와주었던 것처럼요.
이제, 책이라는 꿈 속에서 조금 더 용기 있게 걸어가 보려 합니다.
이름 석 자 박힌 그 표지를 두 손에 꼭 쥐고서.
그러니 부디,
책이 끝나고 나서도, 나의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그리고 그 이야기가 환하고 따뜻하기를.
내 책처럼, 당신의 책도.
내 꿈처럼, 당신의 꿈도.
박지아.
편집자. 에세이스트.
caki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