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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수필가 May 26. 2024

“적당히 잘난 자매의 아주 특별한 4박 5일”

서울 요양병원에서 안동 재활병원으로 전원하는 아버지와 가족의 이야기

  특별한 여행을 위해 온 가족이 함께 하루 사전 답사를 했다. 여행지가 먼 지방이어서 조금 빠르게 둘러봤다. 사전 답사 이후 본 여행을 할 것인가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서울과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한국에서 거꾸로 지방을 택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확신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괜찮을까? 괜찮을까? 괜찮을까?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보통 부모가 아플 때 자식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나고 보면 간병도 사실 상당한 ‘기획’이 필요한 일이다. 우리 엄마는 아산병원 6인실과 감염내과 집중치료실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주말이 되면 가족들이 면회로 병실이 붐볐다. 그런데 창가 쪽에 계시던 할머니는 늘 찾아오는 가족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자식들은 너무나도 잘나서 나 보러 면회를 올 수가 없어”

  할머니의 말씀은 자식이 회사 사업 등 때문에 분주하고 바빠서 면회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셨다. 이렇게 병원에까지 찾아오는 자식은 나름 적당히 잘난 자식들이어서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말씀이 실제인지 아니면 할머니 자존심 때문에 그랬는지 속내는 모르겠다. 하여간 가족들은 면회를 오지 않았다.

  창가 할머니 맞은편 반대쪽 침상에도 할머니가 계셨다. 그런데 현직 초등학교 선생님인 딸이 휴직을 내고 간병을 하고 있다. 휴직 이유는 평생 한이 남을 수도 있고 이때 아니면 엄마와 함께 있을 시간도 없을 것 같아 과감하게 휴직계를 냈다고 한다. 창가 쪽 할머니 이야기로 치면 적당히 잘난 자식의 표본인 셈이다. 그리고 6인실에서 간병인을 제외하고 간병을 하는 사람 중에는 딸과 며느리만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나 같은 아들과 사위는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2005년 아산병원에 엄마 침상 옆에 있으면서 노트로 몇 자 적은 그 당시 일부를 발췌했다.


“오늘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 정말 내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패혈증의 치료법을 찾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이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혹 시계추처럼 그냥 병원이나 갔다 온 것은 아닌지,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알아보고 돌보고 그래야 했는데….

역시 우둔한 자는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 

이제 엄마와 이별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앞으로 엄마에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엄마의 흔적을….(중략)

엄마!

조금만 있다 가세요.

지금 가시면 나에게 한이 될 것 같아요.

내가 지금까지는 너무나 미비한 존재였거든요.

막내아들을 위해서 조금만 버티어 주세요.

정말로 정말로.

엄마 그냥 미안해요.

엄마 자꾸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2005년 3월 29일 22:30 아산병원 동관 9층 집중 치료실에서 막내아들 영진


  이 글을 작성하고 이틀 후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엄마가 아픈 몇 년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고는 아침 회진 시간에 맞추어 의무적으로 병원에 간 것이다.

의사가 엄마의 현 상태를 말하면 잘 듣고 매번 이런 식으로 답변했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우리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의사의 진료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거나 스스로 질문하지 않았다. 의사의 설명이 언제나 부처님 말씀처럼 진리라고 생각했다. 


 장인어른이 많이 편찮으시다. 여느 때와 같이 마장동 ‘서울부동산’에서 근무하셨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이상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아내가 평소 다니시던 강남세브란스 병원에 모시고 갔다. 그 후 아버님의 병환은 회복된 듯 보였다가 이내 악화되어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가셨고 회복되지 못한 채 요양병원으로 오셨다. 그렇게 일 년 이상 침대에 누워만 있는 와상환자로 계셨다. 1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은 가족과의 영상통화와 스스로의 강한 의지로 잘 버티셔서 호흡기를 떼셨지만 가족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아쉬웠다. 여기서 과연 보존적 치료를 위해 요양병원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가? 자식들은 질문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생각에는 콧줄로 식사하는 아버님이 스스로 드실 수만 있다면 더 빨리 회복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음식물을 잘 삼킬 수 있는지 연하 검사를 통해서 한 단계 진보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아버님은 면역력이 떨어진 환자들이 병원 생활을 하면 생기는 CRE라는 내성균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대부분의 수도권 병원에서는 검사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바로 이때 가능한 병원이 있었다. 안동에 있는 병원이었다. 그래서 사전 답사 차원에서 가족들이 방문을 하고 왔다. 어버이날 가족들이 모여서 의견을 모았다. 혹 안동으로 가는 길이 아버님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드디어 D-데이가 잡혔다. 가족들 모두가 이른 아침 요양병원으로 모였다. 앰뷸런스에는 구급대원과 큰딸, 작은딸이 탔다. 그리고 앰뷸런스를 따라 병실에 필요한 짐을 싣고 승용차 한 대가 에스코트하듯 따라갔다. 장시간 이동 때문에 힘드신 것은 아닐까?라는 기우는 다행스럽게 이벤트 없이 아주 잘 안동에 도착했다.

입원 절차 후 병원 생활과 매뉴얼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이사처럼 병원을 옮기는 일도 상당히 이것저것 분주하다. 


그런데 일상의 기적은 다음날 바로 일어났다.

일 년 이상 와상 환자로 계셨던 아버지가 휠체어를 타고 재활실로 가셨다. 재활치료사에 의하면 등과 목에 힘을 쓰실 줄 아신다고 한다. 또한 이 병원에는 침대마다 티브이가 있다. 평소 좋아하시던 정치 뉴스를 관심 있게 보신다.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두 딸이 아버지와 함께 보내기로 한 특별한 4박 5일이었고 그 속에서 희망과 꿈이 보였다.

 4박 5일 있으면서 자매는 조금은 혼란스럽다. 내가 옆에 계속 더 머무르고 간병한다면 아버지의 재활이 좀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사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냄비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가족이 직접 손으로 대보는 것에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다. 

휴가가 끝나는 월요일, 이제 아버지와 두 자매는 헤어져야 한다. 떨어지기 힘든 아버지에게 안심하실 수 있게 충분한 설명을 한다. 아버지도 병원을 신뢰하는 듯하다.

“아빠 휴가가 끝나서 이제 회사에 출근해야 해. 간병인은 전문가여서 우리보다 더 잘하실 거야. 아무 걱정 말고 계셔. 주말마다 우리가 올게”

적당히 잘난 자매의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두 사람의 특별한 여행 동거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아버님 팔순잔치를 맞아 양평펜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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