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전유성, 최유라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주간 베스트로 선정되다
이 글은 이십여년 전 MBC 라디오 지금은 라디오 시대 전유성, 최유라입니다라는 방송에 소개되었던 글이다. 전유성 님이 토씨 하나까지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백화점 상품권 20만 원과 주간 베스트로 선정되어 백화점 입점 옷 상품권 50만 원을 받았다. 아내는 상품권으로 코오롱 등산화와 정장을 장만했다
아내의 출근
선우 엄마 즉 내 아내가 오늘 출근을 했다. 결혼한 지 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앞으로 한 달 정도 선배 언니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우 엄마의 출근이 내게 가져올 크나큰 시련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참으로 나는 아둔했고 미련했다. 그것을 미리 인지했다면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었는데…….
오늘 벌어진 일이다. 엄마가 8시에 나가면서 아이들의 옷과 아침을 준비해놓고 출근했다.
나의 임무는 아이들 깨우는 일부터 진행되었다.
"왕십리 과학자(선우의 별명, 선우 미래의 꿈과 지역의 희망을 안고서 조합한 닉네임이다) 일어나"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럴 때 한쪽이 반응을 안 하면 참으로 난감하다. 학교 갈 시간도 늦었는데 한 번에 깨우면 일어나야지. 조금 더 자겠다고 버티는 모양새이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는 목소리를 높여 깨워본다. 그랬더니 선우는 몸을 한 바퀴 돌면서 이불을 자기 다리 쪽으로 감아버린다. 아내가 나를 깨우면 내가 이불을 감싸는데 선우의 행동이 나와 똑같다. 별것이 다 부전자전이다. 이래서는 아니다 싶어 나는 방법을 달리했다. 선우 엉덩이에 손을 갖다 대고 원을 그려갔다. 속도를 좀 더 빨리했다가 느리게 조절도 해보았다. 선우의 몸이 조금씩 반응한다. 엉덩이를 다섯 번 정도 흔들 때 비로소 몸을 꿈틀덴다. 이때다 싶어 나는 목덜미와 허리 쪽을 잡고서 일으켜 세웠다. 눈을 연신 손으로 비비며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내게 보낸다. 그 표정에서 선우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만 나는 좀 더 강인해지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세수하라 하고 나는 이불을 정리했다. 이미 나보다도 한 시간 전에 일어난 선경이는 깨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정말로 다행스럽고 행복하다.
그런데 씻으러 간 놈들이 나오지를 않는다. 가서 보니 목욕탕 속에 들어가 있다. 학교도 늦었는데 목욕을 하겠다고 막 속옷을 벗으려고 한다. 나는 절규하듯 외쳤다.
"안 돼!".
겨우 달래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엄마가 준비해 둔 옷을 입으라고 했다. 선우는 선경이와 한 살 차이지만 오빠의 모습이 보인다. 비교적 알아서 잘 입고 있다. 선경이는 엄마가 미리 준비해 준 옷을 입지 않겠다고 버틴다.
"그냥 입어. 옷 이쁘고 좋구먼. 선경아, 부탁한다. 제발 입어라. 아빠도 나가야 한다. “
다른 옷을 찾아달라고 간곡히 말하는 선경이를 어쩔 수 없어 아이들 옷 서랍장을 뒤져야만 했다. 그런데 평소에 아이들 옷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온갖 서랍을 다 뒤져야 했다. 선우 서랍인지, 선경이 서랍인지도 모르면서 자동으로 서랍을 빼다 닫았다.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짜증도 같이 증가한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이런 행위들을 반복한다. 이러기를 몇 회가 지나갔지만, 선경이 옷은 찾지 못했다. 그때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선경이가 단호하고 재빠르게 말한다.
"아빠, 옷은 여기 있단 말이에요"
평소 잘난 척을 하는 선경이가 아빠를 놀려주려고 정보를 주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엄마처럼 챙겨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을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을 인내하고 옷을 입으라고 했다. 평소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대발견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경이에 옷 입는 행위였다. 옷 입는 동작 하나하나가 슬로비디오 화면처럼 진행된다. 그것도 연결이 아주 부실한 화면이다. 컷 당 삼십 초도 더 걸리는 듯 하다. 그야말로 양말을 신어도 세월이다. 오른쪽 발에 양말을 끼우기만 했지, 양말을 올릴 생각은 안 하고 있다. 선경이가 이렇게 산만한 아이였는지 비로소 오늘 처음 느꼈다. 한자리에서 옷을 입으면 그만인 것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하나씩 해결한다. 거기다 이미 준비 잘하고 있는 오빠에게 참견까지 한다. 내 고개와 시선도 선경을 따라 같이 움직인다. 그 동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인내를 요구했다. 그런 인동초의 시간이 점차 흘러서 선경이는 옷을 다 입었다.
자 이제 출발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간다.
"자 학교로 출발"
라고 나는 짧고 분명하고 강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선경이가 머리를 빗겨달라고 한다. 내 머리도 평소에 빗지 않는 나에게 선경이 머리를 빗긴다는 사실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주 자상하게 설명하는 선생님처럼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선경아, 아주 머리가 단정해서 빗지 않아도 괜찮아. 자연스러움 그 자체야. “
아니면 오빠처럼 모자를 쓰고 가면 어떨까 하고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래서 머리 쪽은 비교적 쉽게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제 가방을 메기만 하면 된다. 막 가방을 손에 쥐던 선경이가 연필통이 없다고 한다.
나는 아찔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연필 없어도 괜찮아. 색연필로 하면 되지!"
그랬더니 선경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요. 아빠, 선생님에게 혼나요"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오빠가 끼어든다. 매우 거만하고 뽐내면서 말이다.
"김선경!, 오빠가 연필 빌려줄게."
그러나 선경이는 아빠와 오빠 생각과 달리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하는 수 없다. 연필통을 찾는 수밖에는. 찾아야지 기필코 찾아야지.’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선경이와 같이 연필통을 찾으려고 뒤졌였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훈시하고 교육하는 아빠로 변하는 듯하다.
"엄마가 가방 하루 전에 챙기라고 말했지. 학교 갈 준비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자기도 분명 하루 전에 챙겼다고 또박또박 대꾸한다. 연필통까지.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연필통이 없어졌다고 한다. 분실에 대한 증거가 없으니 더 토론하기도 그렇다. 다시 나는 정책을 확 바꾸어서 채찍 정책에서 당근 정책으로 변화했다. 이제 아주 부드럽게 상냥한 아빠의 목소리로 말한다.
"선경아, 오늘만 오빠 연필을 빌려서 해라"
"안 된다고 선생님에게 혼난다고"
아직 이학년이라 그런가.
"선생님이 오빠 연필인지 어떻게 아니, 괜찮아?"
그래도 버틴다. 이미 기다리다 지친 오빠는 선경이를 아빠에게 남겨둔 채 과감히 학교로 출발했다. 오빠가 떠나니 앞으로 남은 잔업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밀려온다.
할 수 없이 다시 찾아 나섰다.
“연필통아, 어디 있니?”
하면서 이방 저방 마루 마당 어디든 연필통이 있을 만한 곳을 뒤졌다. 오래된 구옥의 한옥이라 그런지 이럴 때는 찾을 곳도 더 많다는 느낌이다. 장 밑을 플래시를 켜고서 고개를 오른쪽 돌려가며 쳐다본다. 밑에 구멍은 작은데 내 큰 머리로 쳐다보려니 머리 꽤 아프다. 이런 방식으로 몇 회를 반복했다. 부엌에서 그 귀하디귀한 연필통을 찾았다. 연필통이 있던 곳은 부엌의 찬장 서랍이었다.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따질 시간이 지금은 없는 듯하다.
"가자, 선경아! 학교로!"
선경이가 드디어 학교로 출발했다. 이때 시간 8:45. 그래도 15분이나 남아있어 다행이다. 인제야 마음이 놓인다. 뭐 대단한 육체, 노동과 정신노동을 한 것처럼 몸과 머리가 피곤하다. 제 친구가 피곤함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피곤은 피가 곤해서 생긴다고” 딱 그 말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따져보면 내가 뭐 딱히 그리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뭔가 했다면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서야 엄마들의 목소리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거칠어지는 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앞으로 삼십 일 동안 어떻게 하지. 정말 한 달이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나의 아침마다의 전쟁은 시작되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그때 내 귀를 의심케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빠, 자크 달린 가방 쪽에 색종이가 있는지 봐주세요?"
오늘 하루가 이렇게 긴데요. 앞으로 한 달이 언제나 갈까?
#출근
#등교
#학교보내기
#준비물
#엄마의출근
#딸
#초등학생
#아빠가학교보내기
#지금은라디오시대
#mbc라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