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런 예감이 들었어. 평생 너한텐 질 것 같다는, 사랑 받고 큰 애들은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거라는.”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는 전혜빈이 이런 독백을 한다. 해당 장면에는 정상 가정에서 오손도손 지지고 볶으며 행복하게 자란 서현진과 웬 부잣집에 고고하게 앉아 ‘또 이혼을 할 것 같다’고 딸에게 통보하는 희한한 엄마 탓에 눈물을 삼키는 전혜빈이 대비된다.
이 드라마가 방영할 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TV 채널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이 부근을 보게 되었다. 저런 식으로 둘을 비교한 게 다소 촌스럽다는 감상이 먼저였다. 그리고 뒤따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혼 가정에서 자라면서 동시에 사랑 받고 크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겠네.
세월이 흘러 나는 방송영상 전공생이 되었다. 진로 선택엔 텔레비전이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 TV 픽션 속 “비정상 가정”은 대개 악당이 그렇게 잔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안타고니스트를 동정할 슬픈 사연 정도로 소비된다. 많은 예시들 중 <또 오해영>은 정도가 소소한 편이지만, 유독 명작으로 평가받고 기억에 남기에 비판해본다. 두 오해영의 어머니 캐릭터는 편견과 고정 관념에 기반해 극적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문제점은 ‘드라마’라는 영상 매체가 일상에 너무 가깝다는 점이다. 이들은 허구의 캐릭터이자 드라마 속 극적 장치에 불과하나, 시청자들은 그들을 현실에 투영한다(원래 나는 픽션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드라마들은 결국 일상에 침투해 따가운 편견을 재생산한다.
TV 예능도 마찬가지다. 요즘 예능들은 “비정상 가정”을 그릴 때 몹시 극단적인 사례들을 가져와 최대한 자극적으로 버무린다. 예시로 들 프로그램은 너무 많아 제목을 모두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나는 존재만으로도 ‘이혼 가정에서 자랐으면서 동시에 사랑 받고 큰’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나에게 계속 증명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증명을 하면 될까?
주인공에게 나의 모습이 조금씩 묻어나오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홉 살 즈음에 그린 무인도 생존 만화의 주인공도 지금 보면 나와 꽤 비슷하다.
근래 쓰는 주인공들에게도 나의 모습은 약간 묻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종종 나의 주인공들과 똑같은 설정 하나를 공유한다. 엄마가 이혼한 싱글맘이라는 설정이다. 그러한 캐릭터를 쓰는 건 내가 가장 하고싶으면서 동시에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일에 성공이나 실패는 없다. 나는 그저 조금씩 걸음을 내딛는다.
나의 삶이 빈틈없이 완벽하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편견과 다르게 마냥 행복하고 눈부시기만 하다고.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힘든 때가 있으면 모르는 척 했다. 그러면 그들의 편견에 먹이를 주는 꼴이 되잖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랬던 과거에 쓴 ‘한부모 가정’ 설정의 주인공은 결점이 너무 없었다. 증명을 해야 되니까.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점차 편안함을 찾았다. 슬프거나 힘든 때가 있으면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했다. 나의 주인공들은 차츰 단점이 생겨났다. 자기 몫의 어려움을 끌어안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나의 인물들. 그들을 누구는 동경하고 누구는 동정하고 누구는 애호하고 누구는 무시하겠지만 이제 나는 관객들에게 사랑만 받는 캐릭터를 만들려 들지 않는다.
이영, 재하…. 당신에게 언제 닿을지 모르는 이름들을 호명한다.
이영과 재하는 나와 딱 한가지 설정만 같다. 이혼한 싱글맘의 딸이라는 거. 주인공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이들은 나와 전혀 다른 얼굴이다. 그런데도 내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난 나에게 주어진 일은 언제나 모두 완벽하게 해내려고 한다. 마냥 착한 딸로 살다가 스물한살 즈음에 화를 한번 내고 그 뒤로는 참지 않고 살기 연습 중이다. 이 사회의 옳고 그름에 있어 절대 굽히지 않는다. 자존감과 자존심이 둘 다 강한 특이 케이스다.
쓰던 캐릭터에 내 성격이 튀어나와 그 속의 단점들마저 보일 때면 나는 우선 포장을 시도한다. 그러다 이내 그 날것의 약점을 그대로 이야기에 넣는다. 멋지게 말했지만 사실 아직도 어렵다. 나는 아직 이야기꾼으로서 부족하고 이런 주인공을 쓰는 일은 도무지 쉬워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
나는 이제 마음대로 산다.
이 사회는 나에게 여전히 증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마음대로 산다. 자전적인 요소가 있는 인물이 나오는 픽션을 쓰는 이 행위와 별개로, 난 나의 리듬을 찾았다.
증명을 해야 된다는 오래된 강박이 손끝에서 달랑거린다. 이제 곧 떼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계속해서 내 리듬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톡 떨어질지니.
나와 그 어떤 설정도 공유하지 않는 주인공도 쓸 날이 올 거다. 바로 금방일지도 모른다. 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고 그만큼 주인공도 많으니까. 그래서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한참 나중에, 내가 쓴 다양한 캐릭터들이 필모그래피처럼 쌓이고, 초창기에 쓴 것들은 먼 옛날처럼 느껴질 때. 그때 이영이를 돌아본다면 그녀가 얼마나 낯설까? 처음으로 쓴 미숙한 소설의 미숙한 주인공. 근데 그 어설픈 애가 없었다면 먼 미래의 나도 없었을 것이고 그때쯤 나는 텔레비전을 바꿔 놓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적인 에세이가 아니라 한국 예술의 역사에 대한 글이다(농담이다!).
창작을 하고싶다는 꿈은 부옇게 시작해서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TV를 보던 중학생 시절의 어느 날을 포함해 여러 꼭지점을 지나, 지금 나는 또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 내 심장을 조금 잘라서 이 잡지 위에 올려두었다. 당신은 철철 흐르는 검붉고 새파란 줄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것이 온세상을 덮고도 남을 때까지 끝까지 나는 가겠다고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