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 싱글맘과 달팽이 크낙새 자매
싱글맘 양쯔강 돌고래, 장녀 보석 달팽이, 차녀 크낙새로 이루어진 3인 가족이 아주 평범한 데이트를 나선다. 이들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갈까?
퍼포먼스가 담긴 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예술로 정상 가정 담론을 건드리고 싶은 현서가 예술로 비인간 동물 이야기를 하고싶은 J에게 미술감독을 부탁하며 시작되었다. 서울 한복판과 어울리지 않는 이 멸종 동물 "비정상" 가족은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다. 장녀 보석 달팽이는 때로는 아주 당당하다가도 때로는 시선을 의식하지만, 그녀가 끝내는 담을 무너뜨릴 인물이라는 걸 이 다큐멘터리를 본 우리는 알 수 있다.
촬영 중 가면을 쓰고 사람 많은 곳에 가기를 주저하던 나는, 내가 싱글맘의 딸이라는 걸 밝히길 주저하던 어린 시절의 나와 무척 닮았다. <소근소근 포효>는 이런 작업을 하나라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랐을 어린 나에게 부치는 사소한 혁명의 편지다.
다큐멘터리 <소근소근 포효>는 내게 너무도 소중한 작업이라 이것을 글로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느라 벌써 며칠을 보냈다. 나는 이것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것을 숨기고 혹시 한남동에서 돌고래 달팽이 크낙새 가족을 본 적 있냐며 글을 열기도 했고, 이 작업을 구상하게 된 계기부터 구구절절 쓰기도 했으나, 결국 내가 몇 달 전에 머리를 싸매며 적어두었던 시놉시스만큼 이 작품을 알차게 요약할 수는 없어 일단 냅다 그로부터 시작하는 글을 당신에게 선보인다.
나는 촬영날을 핸드폰 달력에 표시해두고 그 전날밤까지 긴장감에 시달렸다. 나의 유튜브 구독자였다가 실제로 만나 친해진 미술 감독 J는 우리의 거듭된 회의 끝에 결정한 대로 보석 달팽이, 크낙새 가면과 양쯔강 돌고래 인형을 멋지게 만들었다(나의 관심 주제로 영화를 기획하되 가면의 모양은 J의 관심 주제인 멸종 동물로 정했다). J는 크낙새 동생 역할도 맡아 퍼포먼스에 함께할 예정이었다. 또한 같은 수업을 듣고 실리카겔 콘서트를 다녀오며 친해진 S가 촬영을 맡았다. 감독인 나 포함 3인 원정대였는데, 감독인 내가 가장 벌벌 떨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서울 중에서도 “핫한” 곳을 가열차게 돌아다녔다. 도중에 닥터마틴 매장을 갔다가 예상외로 당황 하나 않고 우리를 맞는 직원분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하기도, 브런치집을 들어갔다가 ‘다른 고객들이 불편할 수 있다’는 직원분에게 쫓겨날 뻔 하기도 했다 - 그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촬영을 다 마치고, 온종일 극심한 생리통에 시달리며 티는 안 내려고 애썼던 나는 진통제를 사러 가서 마음껏 티를 냈다. 기숙사 방에 돌아와 촬영한 푸티지를 살펴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촬영도 해냈는데, 앞으로 못할 일은 없어.’
앞으로 못할 일이 없다고, 그런 자신감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신감을 갖자고 스스로를 설득한 경험은 많았지만 말이다. 나는 그 당시에 할 일이 산더미였고 개중 어느 하나 쉬운 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글을 쓰는 시점의 나는 실은 또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통제 통을 쥐고 촬영본을 훑어보던 순간을 떠올리니 그때 그 백퍼센트의 용기가 다시 차오른다.
퍼포먼스 촬영만 끝내면 이 다큐멘터리를 거진 마친 거라고 생각했다. 단단히 틀린 생각이었다. 편집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가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세 가족 구성원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 나는 돌고래 울음소리와 새소리, 동물의 숲 텍스트 사운드를 가져와 셋의 대화를 구성했다. 그러니까 대사를 처음부터 다 짰어야 됐다. 촬영된 푸티지를 간단하게 붙인 것만으로는 나의 진지한 기획 의도 – “비정상” 가정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존재만으로도 그 시선에 맞서는 가족들 – 가 덜 드러난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그에 나도 동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촬영본을 순서부터 재배치하고 아예 다른 대화들을 구성했다. 보다 직관적인 맥락을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다큐멘터리 워크숍 수업 담당 선생님은 대본을 써서 제출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대본을 도저히 못 쓰겠어서 결국 ‘편집하면서 즉석으로 대사를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도대체 누가 그런 중요한 걸 즉석으로 쓰나 싶지만…. 잘하고 싶을수록 미루는 나는 색보정까지 마친 후에 비로소 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당신이 앞서 글의 첫 부분에서 읽은 시놉시스에 쓰여 있다. 장녀 보석 달팽이는 때로는 아주 당당하다가도 때로는 시선을 의식하지만, 그녀가 끝내는 담을 무너뜨릴 인물이라는 걸 이 다큐멘터리를 본 우리는 알 수 있다. 맹랑하게 쓴 시놉시스인데 나는 이 소개가 사실이라고 자신한다. 보석 달팽이는 사람들의 시선에 놀란 동생 크낙새를 안심시키고, '동생 학교 애들도 (이 다큐멘터리를) 보겠죠?'라고 촬영자에게 묻는다. 옷가게를 지나치며 '엄마가 예쁜 옷 좀 더 사줘야 한다'는 돌고래에게 '많이 사주면서~'라고 대답한다. 자신을 멋지게 찍어달라고 하다가 또 그저 즐겁게 논다.
결론적으로는 대사를 즉석으로 쓰길 잘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행인들을 제치며 걸어가는 화면 속의 나, 혹은 보석 달팽이의 행보는 어떤 감정과 향수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흰 워드 화면에서 대본을 미리 썼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싱글맘 양쯔강 돌고래, 장녀 보석 달팽이, 차녀 크낙새 가족은 처음으로 다같이 서울로 놀러가 재미난 하루를 보내고자 한다. 윈도우 쇼핑을 해본다. 힙한 브런치집에 간다. 길을 건너려다 대놓고 수근거리며 가족을 찍는 행인을 마주한다. 두 자매는 별안간 놀이터에도 들른다. 거리를 지나다니며 수다를 떤다. 그리고 “네컷” 부스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다. 그 위에 이 가족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나(이때의 나는 보석 달팽이가 아니다)의 비장한 내레이션도 깔린다.
자매가 자신들을 희한하게 보는 사람을 개의치 않고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장면은 네컷 부스에서 다같이 가족 사진을 찍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우리 엄마는 편집본을 보여주자 그 부분에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 내 회심의 다큐 중 회심의 장면, 감동적이면서도 오글거리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정서가 있으며 저작권은 없는 음악을 최대한 찾아 아주 작정하고 편집한 장면이긴 했지만 엄마가 울 줄은 몰랐다. 엄마는 내 앞에서 잘 울지 않는 사람이라 그랬다. 게다가 나는 외동이고, 이 다큐멘터리 속 가족은 여러모로 우리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엄마가 눈물을 좀 흘렸다.
엄마와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으로 편집본 상영을 마치며, 내가 예술을 하고싶었던 이유가 이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미숙한 감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속에는 돌고래와 달팽이, 크낙새로 이루어진 가족이 있다. 이 가족은 실제로 있지는 않지만 사실은 어디에나 있다.
그들이 사는 세계 속 또다른 감독이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말한 바에 따르면,
‘어쩌면 내가 이렇게 낱말을 붙이는 과정도 불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속삭임은 이미 조금씩 담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소근소근 포효>는 제가 현재 열심히 영화제에 내는 중이라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다만 극장 공개가 이리저리 요원하면 유튜브에 올릴 생각도 있습니다. ^_^ 우선 스틸컷이라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