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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Jun 03. 2024

대한민국 아줌마의 스윙댄스 도전기

 2015년 설 연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수요일이었다. 이번에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가 사는 지역의 스윙댄스 동호회를 검색하였다. 사실 며칠 전, 탱고를 하고 있던 동갑의 동료교사를 통해 이런 소셜 댄스도 있다는 걸 처음 알 수 있었다. 검색 결과 스윙댄스 동호회 두 개가 나왔고, 그중 하나를 구경삼아 가보았다. 주말이 아닌 평일 소셜시간(자유롭게 춤추는 시간)이라 남자는 한분, 여자는 3~4분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음악이 나오자 자연스레 홀딩을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뭔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신세계였다. 


 그때 당시 나는 7살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이었고 원래부터 춤을 좋아하는 성향을 꾹꾹 누르며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였다. 애엄마가 춤이라니, 그것도 남녀가 같이 춤을 추는 소셜 댄스라니. '춤바람'이라는 말이 아직도 쓰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당치도 않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잠깐 스쳐갔다. 하지만 나에게 일상의 탈출구가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3월부터 시작하는 6주간의 지터벅(jitterbug, 절대 지루박이 아니다)이라고 불리는 초급 강습을 큰 고민 없이 신청해 버렸다. 나는 남편과의 길고 긴 5년 간의 연애 때부터 워낙에 재즈댄스, 벨리댄스, 에어로빅 등 춤에 미친 사람(결코 잘 춘다는 뜻은 아니다)이라는 걸 끊임없이 보여주었기에 이번에도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 부부 사이에 허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만큼은 허락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다. 예의상 남편에게 같이 배우자고 말은 하였는데, 춤을 안좋아하는 그의 특성을 미리 알고 있어서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나 혼자 맘껏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이제야 밝힐 수 있지만 내심 안도감도 느꼈다.


OO님!


 동호회 활동을 하기 위해 일단 닉네임을 정해야 한다. 얼굴이 잘 발그레 해지는 나의 특성을 과일에 비유하여 나름 귀여운 이름으로 정했다. 이건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나의 별명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이 별명으로 불릴 줄은 고등학생 시절에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나의 외모와는 안어울리는 그만큼 귀여운 별명이다. 내 본명이나 사회적인 역할로 불려지지 않고 별칭으로 불려지는 게 너무 신선하고 좋았다. 직업이나 결혼여부, 자녀유무를 서로 묻지 않고 오로지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순간이 정말 좋았다. 물론 나중에 자연스럽게 밝히고, 밝혀지기는 하지만 동호회의 목적인 스윙댄스가 있었기에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지터벅 첫 강습 시간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나의 첫 번째 스윙댄스 수업인 지터벅의 강사 두 분은 동호회에서 만나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였다. 강사님들이 주차난 때문에 5분 정도 늦었는데 설렘으로 가득 찼던 나는 그깟 5분 정도는 쿨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스윙댄스에 대한 간단한 설명 및 에티켓과 함께 시범을 보여주셨을 때 팔뤄 강사님의 촤르르 퍼지는 스윙댄스 치마가 너무 예뻤던 게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덕분에 나에게는 현재 10개가 넘는 스윙댄스 치마가 있다. 그냥 마냥 좋았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기쁨도 컸고, 집과 직장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도 좋았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운이 좋게도 우리 기수는 다른 기수들보다 사람이 많아 제법 많은 동기들이 나에게도 생겼다. 아쉽게도 지금은 나를 포함하여 2명밖에 우리 동호회에 안남아 있지만 그때는 많은 동기가 있어 엄청 든든했다. 모두가 어색하고 낯선 환경에서 동기들은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서툴고 부끄러웠지만 동기들에게는 좀 더 편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스텝, 스텝, 락스텝" 구호를 외치며 아주 기본적인 스텝부터 배웠다. 지금 지터벅을 배우시는 분들도 나 때와 똑같이 말을 되뇌며 스텝을 밟는 모습을 보면, 나의 초보댄서 시절이 떠올라 어색함을 느끼시지 않도록 먼저 다가가 홀딩 신청을 하고 싶다. 가끔은 이런 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눈치로 알 수 있지만 모른 척 그냥 다가가기도 한다.


 1시간 반의 강습이 끝나면 그 뒤에는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는 "소셜시간"이 찾아온다. 나는 이 시간이 제일 재밌고 신이 났다. 스윙재즈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면, 특히나 춤을 잘 추는 리더들을 만나면 내가 정말 스윙댄스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인생을 즐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땀을 흘리고, 얼굴이 벌게진 채로 대형 선풍기 앞에 서서 다른 분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생생한 이 현장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스윙댄스를 한 지 벌써 9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강렬했던 첫 기억은 아직도 내 맘속에 좋은 기운으로 잘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 시절 2년 동안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것이 엄청난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재는 가끔씩 초급이나 초중급 팔뤄 강사도 맡는 동호회의 오래된 조상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내가 실력이 뛰어나서라기 보다 동호회의 특성상 선배들이 강습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도 스윙댄스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고 춤에 진심인 나는 다른 지역이나 해외로 여행을 가면 그곳의 스윙빠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소셜 댄스 시간이 맞으면 그 지역의 스윙빠에 가서 춤을 추는 데 이를 '외부출빠'라고 부른다. 가족 여행 시 내가 춤을 추는 1~2시간 동안  남편과 아들이 카페나 다이소, 때로는 영화관에서 시간을 때우는 데 정말 고맙기도 하고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한 가정에서 엄마가 행복하면 그 좋은 에너지가 다 가족들에게 가니까 가성비가 참 좋은 취미생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스윙댄스는 파트너 춤이기에 물리적으로 혼자 추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정서적으로도 서로 눈빛을 교감하며 음악으로 대화를 하는 그야말로 환상의 댄스이다. 그러기 위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눈맞춤도 잘하고, 설령 비즈니스 스마일이라도 웃으며 추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 대한 예의를 먼저 차리기 위해 진정으로 그 시간을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일 것이다. 때때로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거나 외부에서 유명한 리더분이 우리 동호회에 출빠를 하면 흥을 주체하지 못해 막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 이제는 조금씩 내 춤도 여유와 느긋의 맛을 아는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


 사실 50대가 되어서도 스윙댄스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있다.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외국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례를 들어주며 남의 시선 따위는 생각지 않고 오롯이 나만을 위하여 춤을 추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는 당분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 플로어에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므로. 춤과 스윙재즈 음악이 있어서 나의 인생은 감사함으로 넘쳐난다. 내가 스윙댄스 동호회에 맘 편히 다녀올 수 있도록 저녁을 먹은 후(설령, 그 저녁이 라면이나 맘스터치의 치킨버거일지라도) 설거지를 깨끗이 해놓고, 출빠 한 나를 밤늦은 시각에 데리러 오는 내 남편에게도 말보다 이 글로써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다.


남편, 쌩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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