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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Jun 29. 2024

 대한민국 아줌마의 전국노래자랑 본선 진출기

 때는 바야흐로 8년 전 겨울방학 끝 무렵이었다. 스윙댄스 동호회를 다닌 지 1년이 되는 시점에 제법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당시 로로는 나와 같이 어린 아들을 키우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워킹맘이었고, 뮤리엘은 열심히 회사에 다니고 있는 멋진 아가씨였다. 지금은 다들 아들만 키우는 아줌마가 되었지만 우리는 전국노래자랑 본선진출 이야기를 가끔 꺼내 인생의 유쾌했던 순간을 안주 삼아 맥주 한잔씩 기울이며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자고 한 건 뮤리엘의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그녀는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끼쟁이였고, 로로와 나는 그런 뮤리엘을 따라 뒤에서 백댄서를 하기로 하였다. 한때 트로트 가수를 꿈꿨었던 뮤리엘은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이쁘고 춤도 잘 췄다. 그녀들은 이미 지인들의 결혼식 축하공연이나 대학교의 축제무대 등 공연 경험이 많았다. 아이도 잘 키우고 직장에서 일도 잘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는 그야말로 인생을 즐기는 그녀들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20대의 그 찬란했던 젊음을 즐길 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학교만 다니고 바로 직장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하고 2년 뒤 아이를 낳으면서 별로 인생을 즐겨본 기억이 없었다. 대학생 시절에도 학교와 집만 오갔는데, 직장인이 되어서도 학교와 집만 오갔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을 줄 알듯이 평생 인생을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는 내가 그녀들을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만난 건 30대 중반에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그래도 현실은 8살 어린 아들을 키우는 아줌마로서 놀고 싶다고 해서 얼마나 놀 수 있었겠나. 그 당시 뮤리엘의 가볍게 전한 전국노래자랑 도전 제의는 나에게는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일상의 신선한 탈출이었다. 나에게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자고 말해 준 뮤리엘과 함께 해준 로로가 정말 고마웠다. 

 

 본선이 있다는 말은 예선이 있다는 뜻이다. 노래는 뮤리엘이 부르기로 하고 로로와 나는 뒤에서 춤만 추기로 하여 부담 없이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 하고 심지어 멘트까지 해야 하는 뮤리엘의 표정에서 떨림을 느낄 수 있었지만 센터의 무게란 원래 그런 것이다. 예선이 있던 날 그녀들이 예전에 공연을 위해 입었던 의상을 빌려 입고 구청의 문화예술회관으로 갔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참여하였고 우리의 빨간색 의상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거의 600팀이 예선에 참가하였고 그중 15개 팀만 뽑는 거라 경쟁률도 상당하였다. 예선도 1차와 2차로 진행이 되었는데 우리 순서는 한참 뒤에 있어서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예선 참가자들을 보며 많이 웃기도 하고 우리가 준비했던 안무를 맞춰보기도 하였다. 참가 시간이 다가올수록 떨렸고 누가 챙겨 왔는지 모를 우황청심원을 먹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참가자뿐 아니라 그냥 구경 나온 주민들도 많이 계셨는데 우리 순서를 일부러 기다리시는 분들도 있었다. '빨간 원피스 아가씨들 무대는 보고 가야지'라는 말이 들리면 아가씨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고 사람들의 기대도 있다는 사실에 내심 응원이 되었다. 


1차 예선을 기다리며 우황청심원과 김밥도 먹었다. 진짜 젊었네! 

 

 1차 예선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알려주는데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평범하였으나 의상의 힘이 커서 합격을 하였다. 2차 예선 진출자는 한 50팀 되었었나? 50팀이 다 한 번씩 심사를 받자 시간이 어느새 새벽으로 넘어간다. 2차 예선까지 하고 본선진출팀을 발표하는데 거의 마지막으로 우리를 호명했을 때 너무 좋아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껴안았다. 내가 전국노래자랑 예선을 본다고 했을 때 아빠가 하신 말씀이 있었다. "너네가 본선 진출하면 아빠 손에 장을 지진다." 본선 진출 소식을 알리며 내가 아빠에게 했던 말도 있다. "아빠! 손에 지져!" 많은 팀을 뚫고 우리가 전국 방송인 전국노래자랑의 본선에 진출하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빠는 그저 웃으며 놀라고 하셨고, 항상 반응이 좋은 엄마도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셨다.


 2-3일 뒤쯤 본선인 녹화가 진행되었고 우리는 즐겁게 잘 참여하였다. 로로와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무대에 올라갔고 우리들은 다른 노래에 맞추어 춤도 더 추면서 나름의 흥을 발산하였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인기상을 노렸는데 더 막강한 스승과 제자팀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는 우리들에게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본선 녹화 시 故 송해 선생님도 직접 만나서 정말 신기했다. 너무나 젠틀하시고 얼굴이 엄청 작은 연예인 포스도 느껴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도 춤을 좋아하는 우리 아줌마들은 현실에 치일 때도 많으나 한 번씩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지금은 그때 입었던 의상과 신발도 남아있지 않지만 남들과는 좀 다른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자부심이 마음 한편에 항상 있다. 나에게는 가문의 영광이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의 경험담을 자랑스레 말할 것이다. 아이 키우면서 한창 힘들었을 시간들을 즐겁고 유쾌한 시간으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준 나의 그녀들에게 정말 감사하다. 


아우디! (아줌마들의 우정은 디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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