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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Jul 01. 2024

상추, 드디어 나무가 되다

끝이 어디일까 너의 잠재력  - 하상욱 단편시집 '다 쓴 치약' 중에서


 우리 반 텃밭상자의 상추를 보고 불현듯 오래전 인기였던 하상욱 시인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짜도 짜도 계속 나오는 치약을 보며 끝이 없는 잠재력이라 표현한 시인의 통찰력이 대단하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웃음을 줘서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요즘 나는 상추의 끝이 없는 잠재력에 대해 감탄을 하고 있다. 뜯어도 계속 자라나는 상추를 보며 뜯을 때마다 놀라워하는 나를 감출 수 없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텃밭 상자를 한 바퀴 둘러보니 주말 동안 성큼 자라 있는 상추가 그 존재감을 뽐낸다. 우리 반 아이들과 그렇게 뜯어먹고 또 뜯어먹었는데 언제 또 이렇게 자랐는지 정말 신기하다. 비 오는 주말 내내 물을 흠뻑 맞아 오늘따라 상추가 더 싱싱해 보여 상추를 뜯는 내 손이 더 경쾌하다.


 학교에서 사준 상추 모종을 심고 물만 주었을 뿐이다. 사실 물도 자주 주지 않았다. 교감선생님으로 추측되는 마음씨 좋은 누군가가 우리 반 텃밭에도 물을 아침마다 주고 있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 자라는 상추를 보니 자연의 신비는 정말 대단하다. 아이들과 상추를 뜯는 날이면 깨끗이 씻어 물을 탈탈 털고 급식실로 상추 바구니를 가져가 맛있게 먹는다. 고기반찬이 아니더라도 비빔밥이나 맨밥을 야무지게 상추에 올려 쌈을 만든 후 입안 가득 여름을 느낀다. 텃밭상자에서 바로 딴 상추이니 얼마나 신선하겠느가? 푸드마일리지(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 식품이 이동한 거리에 식품의 무게를 곱으로 나타내는 수치- 출처: 네이버 블로그 환경교육 퉁합플랫폼)가 제로다. 본인들이 딴 상추라서 그런지 더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집에서는 흔한 상추가 우리 반에서는 아이들이 많이 찾는 대접받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평소 잔반을 많이 남기는 아이들이지만 서로 먹겠다며 상추에 욕심을 내는 우리 반 아이들이 귀엽다.


 그런 상추가 점점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반의 텃밭상자뿐 아니라 다른 학년의 텃밭상자에도 상추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어찌나 다들 깔끔하게 상추를 잘 뜯어내는지 점점 나무의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제대로 상추의 줄기를 본 건 이 나이 먹도록 처음인 것 같다. 굵은 상추의 줄기가 내 눈에는 나무처럼 보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위로 올라가는 상추의 잎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의 수확량을 보여주는 상추의 줄기


 상추의 끝은 어디일까? 방학하기 전 텃밭에 있는 작물을 다 뽑을 예정이지만 만약 뽑지 않고 그냥 둔다면 상추를 언제까지 수확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상추의 잠재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앞으로도 꽤 많이 새 상추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그냥 물만 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잘 자라는 상추를 보며 아이들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 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물만 주었다고 해서 상추가 잘 자란 건 아닐 것이다. 영양이 가득한 텃밭의 흙, 햇빛, 바람 등 많은 요소들이 상추를 잘 자라게 도움을 주었다. 상추모종을 심는 시기도 매우 중요하다. 햇빛이 강한 오후에 심으면 여린 모종이 마를 수 있기에 가급적 오전에 심고 물을 흠뻑 줘야 한다. 옆 반 선생님도 나와 같은 상추를 심었지만 며칠 늦게 심었다고 해서 햇빛에 타들어버린 모종들도 몇 개 볼 수 있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상추가 나무가 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인가?


 우리 아이들도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세상에 나온 특별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의 소유자들이다. 그 잠재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물, 바람, 햇빛, 흙과 같은 요소들을 조화롭게 잘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학부모와 교사가 서로를 신뢰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애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교육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신규 교사일 때만 해도 정년퇴임이 당연했는데 지금은 명퇴를 꿈꾸는 한 명의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사일 뿐이다.


어쨌든, 명퇴 후 상추는 꼭 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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