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첫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하루 벌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었더니 구정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설프게 마감한 고시원 지붕이 폭우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푹 젖어버린 책에서는 진흙탕을 뒹굴다 헐떡이는 요크셔테리어 냄새가 났다.
도망치듯 서울로 온 내 삶에 낭만 따위는 없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짧은 기간 신문 배달로 모은 돈을 등록금이며 입학금에 쏟아 넣고 나니 삼십만 원이 남았다. 근처의 고시원을 찾았다. 책상과 침대가 있는 방은 이십만 원부터 시작했다. 창이랍시고,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열리지도 않는 아크릴 조각을 붙여놓은 방은 알량한 웃돈을 받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싶어 만 원을 더 주고 햇빛을 샀다. 남은 돈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시원의 냉장고에서 반찬을 훔쳤다.
키가 큰 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우면 머리와 발이 양쪽 벽에 닿았다. 돌아누워 이불을 뒤집어쓰면 옆방에서 발톱을 깎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반년 정도를 살았던 뒷방 아가씨는 종종 남자를 자기 방에 끌어들였다. 늘 불만에 차 있는 고시생들이지만 어쩐지 이 일은 묵인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하이파이 음질의 오디오 포르노그래피를 원 없이 청취했다.
스무 살의 치기는 또 그 나름대로 채워야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압구정의 잘나가는 미용실에서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 번 했더니 한 달 치 생활비가 훌렁 날아갔다. 실크 매직이라고, 이름 한번 그럴듯했다. 돈 없다는 게 다 거짓말이었다. 염색은 고시원 샤워실 구석에 숨어서 셀프로 했다.
싸구려 소프트렌즈에 구제 밀리터리 셔츠를 차려입고 이대 거리에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그곳까지 나가야 리터칭이란 걸 받아볼 수 있었다. 보정할 것이 없다는 사진사의 말에 헤벌쭉 넘어갔다.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좌우지간 그때로서는 최고로 멋을 낸 와꾸였으니까. 젊은이는 본래 바보지만, 정말이지 바보 같은 젊음이었다.
그때 나는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막노동판에 뛰어든 데는 돈을 많이 준다는 것 외에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럭저럭 몸이 견딜 만한 노동의 대가로는 하루에 육만 원을 받았다. 작업이 조금 거칠면 십장의 판단 아래 칠만 원이 주어졌다. 수입의 일 할을 인력소에 떼어 주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공사장에서 밥 두 끼를 주었기 때문이다. 오만 원 이상의 현금이 온전히 내 손에 남았다.
물론 다른 기회도 있었다. 그해 수능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과외를 시작했다. 하필 내가 처음 상대하게 된 것이 찢어지게 가난한 대가족 집안의 큰딸이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나는 월곡의 골목길 어딘가 다 쓰러져 가는 담장을 세 개 정도 타 넘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그에게 ‘가르쳐’ 준답시고 두어 시간 동안 무언가를 열심히 떠든 뒤에 막노동꾼의 하루 일당보다 많은 돈을 받아 챙겼다. 추측건대 그의 어머니는 그 돈을 대기 위해 식당 일인가 빌딩 청소인가를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무너진 담벼락에서 초인종을 찾아 누르는 일과 애 어머니가 때 묻은 앞치마를 마룻바닥 구석으로 밀어놓으며 내 눈치를 살피는 일과 낮잠에서 막 깬 노파가 선생 대접한다고 반쯤 맛이 간 식혜 따위를 내놓는 일과 이 모든 것의 결과물로 돈뭉치가 펄럭펄럭 날아 들어오는 일을 견딜 수가 없어 두 달을 채우지 못한 채 그 집에서 나와 버렸다. 살아남기 바쁜 나는 환멸의 목적지가 어디에 이르더라도 개의치 않았지만,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일만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B를 만난 것은 그런 무렵의 일이었다.
※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문학창작산실(수필) 선정작. 이 글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인 문장웹진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