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를 만난 것은 그런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는 몇 번인가 함께 집회에 나가고 명동에서 한 번 데이트를 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 분명하여 연인이 될 수도 있었던 우리 관계는 그러나 B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의 몇몇 행동 때문에 파국을 맞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이론가들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조금 격하게 표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처럼, B는 나의 그런 불만이 진보를 거부하는 것이라 단정해 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 ‘진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B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상처를 받은 나는 나대로 B를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나는 B가 당당할 이유가 없다고 따졌다. 택시를 타고 평창동으로 귀가하는 B가 ‘마이너리티’에 대하여 진술하는 모습을 볼 때의 거부감은, 나는 사실 사상 같은 거 관심 없었고 반쯤은 재미로 운동권 생활을 했다고 실컷 떠벌린 뒤에 그래도 나는 진지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무리하는 어느 소설가의 뻔뻔함을 보았을 때 들었던 당혹감과도 약간은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늘 그렇듯, 어쩌면 이것은 그저 서로의 콤플렉스가 잘못 분출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싸움은 언제나처럼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저 B와 나에게는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선배 중 하나가 나를 위로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이런 짓을 왜 계속 해야 하는 건가요, 하고 술이 두 병쯤 들어갔을 때 내가 내뱉듯 묻자, 선배는 말없이 젓가락으로 김치전을 찢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눈이 유난히 촉촉한 형이었다.
거창한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아니, 그보다 답변 자체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본』과 『공산당 선언』에서 시작한 선배의 이야기는 뒤르깽과 베버를 거치더니 복잡다단한 방향으로 예측할 수 없게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엉성하게나마 마르크스를 읽었고 그가 인용하는 구절 역시 내가 어디선가 본 것임이 틀림없는데 그의 이야기는 어째 이해되지 않는 문장만 모아놓은 것처럼 들렸다. 그 맥락을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시경제학과 신자유주의까지 싸잡아 비난하던 그는 어느 순간 두서없이 설명을 끝내버렸다. “알겠지?” 하고 그 촉촉한 눈을 빛내는 형 앞에서 나는 망연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이상 해설을 요구해 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건 니가 아직 사는 게 편해서 진정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사는 게 편해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야, 이 씨발아 그게 뭔 개소리냐고 귀싸대기를 날려주는 대신 나는 어쩐지 그와 함께 마르크스 씹새끼를 외치며 건배했다. 그리고 해가 뜰 때까지 꽃다지의 노래를 호기롭게 부르다 헤어졌다. 나는 다음날 휴학계를 내었고, 이 시기의 어느 사람들에게나 마찬가지로 그 선배와는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1987년과 2003년을 비교할 능력도 없을 만큼 빈약했던 내 지성은 이런 의심의 구체적인 대상을 포착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학생이라 자칭하던 그룹의 고작 일부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환멸의 대상이 될 만한 아주 추상적인 환멸 덩어리를 만들어 놓고 그걸 찌질이라 부르며 환멸했다.
막노동 현장에서는 이런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문학창작산실(수필) 선정작. 이 글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인 문장웹진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