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공무원의 병휴직 체험기
신설학교 행정실로 발령받았어요.
신설학교의 새 건물과 가까이 있는 옆 학교에서 한 칸 사무실을 빌려 더부살이를 합니다.
예산을 확인하자마자 학교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합니다.
사무용 볼펜에서부터 과학실 실험대까지 정말 모든 걸 사야 합니다.
신축 건물이 잘 올라가고 있는지 먼지 가득한 공사장을 수시로 체크합니다.
1월에 발령받고 3월에는 새건물에 들어가야 하니, 2월에 있는 명절에도 맘 편히 쉴 수가 없어요.
수당이 없는 초과근무를 지속하며 앞만 보고 달립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학교 건물에 책걸상 먼저 들어오고 행정실 팀들 3,4명이 먼저 자리를 잡아요.
건물의 준공까지 필요한 행정 업무를 진행하고, 3월 개교까지 필요한 절차들을 밟아야 하니까요.
교무실에도 선생님들이 업무를 보기 시작합니다. 서로 도와가며 개교까지 열심히 달려갑니다.
성공적으로 개교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교원 업무 정상화로 인해 행정실 업무분장에 대해 조정안이 제시되었어요.
교사들의 요구사항이 거세니 관리자분들도 어찌할 바 모릅니다.
협의 자리가 계속됩니다. 목소리도 커집니다.
조금씩 양보하면 되는데, 누구도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실장님~ 지금까지 고생 다 해놓고 왜 그래요 칭찬도 못 듣게..."
요구사항을 얼마나 더 들어줘야 칭찬이란 걸 받을 수 있을까요?
"예전 학교에선 안 그랬어요"라는 A선생님의 말에 저는 특이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몇 안되는 직원들도 부담스런 상황에 일할 맛 안 난다 불평만 높아집니다.
정답도 없고 합의점도 없는 기나긴 싸움을 1년 하다가 정말 멘붕이 오고야 말았어요.
난 누군가? 지금 여긴 어딘가?... 노래 가사처럼 저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지요
안구건조증이 점점 심해졌어요. 좋다는 병원은 다 돌아다니며 새로운 시술을 받아 봤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만 지나면 눈이 시리고 시력은 더 나빠지더라고요.
눈을 뜨고 있는 게 고통이라 근무 중에도 잠깐 안대를 하고 있으니 눈물이 흐릅니다.
주말이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왔어요.
그동안 주말도 없이 일했던 몇 개월에 대한 보상으로 넷플릭스를 보며 무조건 뒹구리라 마음먹었지요.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신설학교를 위한 각종 업무와 연락할 일들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와 동시에 편두통도 찾아옵니다. 진통제를 먹으며 잠을 청합니다.
갑자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서 받아보니 소방서라고 합니다.
수신기가 오작동되었다는 연락을 세콤에서 받아서 연락하였으니 현장확인을 해보라고 합니다.
주말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이젠 조용한 주말이 이상하다 느껴질 정도지요.
아침 일찍 업무협의 하자고 선생님 한분이 행정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옵니다.
어제도 대화의 90%를 혼자 말씀하시더니 결론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네요.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귀에 담아지지 않는 그분의 목소리 너머 어지럼증이 밀려옵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에서 한숨 자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그때서야 더 이상의 정상적인 업무진행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난 거였어요.
저는 운전할 때 그냥 늦게 가는 게 맘 편한 사람이에요.
급한 사람에게 양보하자, 걸어가는 것보다는 빠르니 이걸로 됐어 라며 저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는 편이죠.
공직 생활도 마찬가지였어요.
요구사항을 먼저 들어주는 게 맘 편하고 승진이 좀 늦다 싶어도 그건 제 욕심이다 생각했어요.
몸에서 보내는 여러 가지 신호를 느끼며, 역시 저라는 사람은 잠깐 쉬어가야겠다 마음먹었지요.
아이들 교육비에 생활비는 빠듯하지만 이렇게 계속 일하다가는 제 명에 못살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어두운 표정의 내 모습을 보며 걱정하는 가족들을 보는 게 더 고통스럽기도 했지요.
지금도 다행이다 싶은 건 마음의 병이 있다는 걸 저 스스로가 인정했다는 점이에요.
패잔병과 같은 수치심과 무력감까지 엄습해 오면 어느새 눈물바다가 됩니다.
침대와 일심동체가 되어 있는 저를 생각하니 한심해서 한숨만 나옵니다.
"이것도 인생에서 하나의 과정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휴직을 신청하였답니다.
이럴 때 휴직하는 거지 언제 휴직하겠어요?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나의 운신(運身)을 왜 혼자서 갈등하고 있었나 싶었지요.
복직 후 돌아보니 저도 다른 사람들이 휴직한 것에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더라고요 ㅎㅎ
어느 유튜브 강연에서 심리전문가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른의 고민은 돈이 든다"...
정말 그렇더라고요.
정신과 치료는 첫날부터 돈이 꽤 들었습니다.
몸을 진단하는 CT등에 비하면 그래도 저렴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요.
심리상태 문항지는 제가 직접 작성해야 하는 것인데 왜 비싼 돈을 내야 하는지 좀 억울하다 싶었네요.
무식한 소리 하는 것 보니 아직 정신 못 차린 듯합니다 ㅎㅎ
약발이 정말 잘 드는 저에게 정신과 약은 너무나 강한 약이었어요.
소량으로 처방해주시면서 의사 선생님께서는 장소를 바꿔주는 휴양이나 입원을 권하시더군요.
평소에 밖에서 자는 걸 싫어해서 여행조차 불편한 저에겐 그야말로 극약처방이었어요.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말씀드리고는 방책을 강구했습니다.
마침 심리상담센터가 집 가까이 있어서 전화를 걸어보았어요.
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정말 딱이다 싶었지요.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심리상담이란 걸 저도 경험해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니 괜히 재밌게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역시 현실은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됩니다.
시간당 10만원의 상담비가 드니 시간에 꼭 맞춰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덜컥 화부터 나더라고요.
밤이 어두워야 새벽이 온다는 말이 있지요...
그동안 우리는 어두운 밤의 진가를 무시하고 어둠 자체를 너무 터부시 한 것은 아닐까요?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북쪽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 북두칠성이 보입니다.
길을 잃고 헤맬 때 이정표가 되어주는 고마운 별자리입니다.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다 보니 여기저기 귀하고 좋은 자료도 많이 있었고 저와 같은 고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주변에도 많다는 점에 정말 놀랐어요.
이 세상에 이렇게나 빛나는 북두칠성이 있었음에도,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살았던 거예요.
하물며 그 방법들은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귀한 줄도 몰랐다는 거죠.
제가 찾은 가장 쉽고 편한 치료법은 아침 산책과 샤워였어요.
우울증은 수용성이란 말이 있더군요.
나를 꽁꽁 싸매던 침대와 이별하고 산뜻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새들의 노랫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듣는 아침은 그야말로 신선함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음식을 제공받는 기분이랄까요?
집으로 돌아와 향기로운 바디젤로 가볍게 샤워하는 것은 촉각과 후각을 동시에 릴렉싱하는 효과가 있어요.
휴직한 기간 동안은 급하게 서둘러 나갈 일이 없으니 언제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어요.
늦은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 속에 푹 빠질 수도 있었지요.
저녁에는 손가락 발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요가를 했는데요, 그동안 눈여겨 봐주지 못한 신체조직들이 점점 살아나는 시간이었답니다.
겨우 3개월의 질병휴직기간 동안 저는 예전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불교에서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고 만물은 항상 변한다는 것만이 진리라고 하더군요.
그런가 봐요.
내가 변했을 수도 있고 세상이 변했을 수도 있으니, 폭풍 속에서 내려와 잠시 쉬었다 가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요?
본인만의 북두칠성을 찾아보세요!
인생에서 꼭 한 번은 해볼 만한 일이랍니다.
공직생활의 긴 여정을 산을 오르듯이 살아왔다면 아마 저는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되지 못했을 겁니다.
남들의 눈에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무언가 완성된 결과를 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저는 잠시 달콤한 낮잠을 청해봅니다.
표지사진: Unsplash의Greg Rako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