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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놀이 Oct 09. 2024

프롤로그

  인연. 나에게도 나만의 인연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 꼭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매번 남들 얘기만 들을 게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말이다. 조금은 있어 보이기까지 하면 더욱 완벽하다.


  20대 중반에 첫 직장을 얻은 나는, 평소 집돌이 성향을 가졌기에 집과 회사를 오갈 뿐이었다. 외출하는 일이라곤 장을 보거나 운동을 나갈 때였다. 이런 나를 바깥에 나가봐야겠다고 느끼게 만든 것이 연애에 대한 갈망이었다. 나는 반반한 외모는 아니지만 착실히 저축하며 운동하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않은지 수차례 생각해 왔다. 하지만 따로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어디에서 이성을 만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만남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고, 결국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번호를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그렇다고 가장 흔한 방법인, 술집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혼자 도서관이나 카페를 다니며, 나의 운명의 상대를 찾아보기로 방향을 잡았다.


  한가로운 비번날 사뭇 진지하게 작전에 돌입했다. 한껏 꾸미고 거울에 비친 나를 점검했다. 읽을 책도 챙겼다. 적당히 유동인구가 있는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혹여나 나타나지 않아도 당분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부한 것에도 충분한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나의 그녀가 화려한 배경을 빛내며 아름다운 종소리와 함께 등장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며칠을 공부한 끝에, 처음으로 흥미가 가는 이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혼자 공부하러 온 것으로 보였고, 내가 앉은 벽 쪽 소파 자리에서 두 칸 옆자리에 앉았다. 민낯에 마스크를 썼고, 머리는 포니테일, 복장은 편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런 스타일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새하얀 분칠, 새빨간 입술, 화려한 원피스보단 그녀와 같은 안락한 느낌이 더욱 편안했다. 이젠 번호를 물어볼 기회를 노려야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연락처를 물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건 차치하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티가 나지 않게 심호흡을 여러 번 해봤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진짜 한 번만 용기 내서 물어보자..!' 마음을 먹고 일어나려는 순간, 중력이 몇 배나 강해졌는지 엉덩이가 한치도 띄어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일 수 있지만, 나는 끝내 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모두가 카페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마음은 홀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결국 한보 후퇴하기로 마음먹었다. 용감하게 직접 물어보면 좋겠지만, 메모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최대한 정갈하게, 번호를 알려줄 수 있냐는 짧은 한 줄을 적었다. 그리곤 자리를 조금씩, 조금씩 그녀에게로 옮기며, 내가 뻗을 수 있는 유효거리 안에 들어온 지점에서 그녀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그녀는 얼떨결에 쪽지를 받고 눈이 둥글해지고 고개를 짧게 갸우뚱하며 소리 없이 쪽지를 읽었다. 나름 깔끔하게 꾸미고 온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꽤나 기대를 했다. 그 짧은 찰나에 번호까지 받는 상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머리를 넘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어렴풋이 가리며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애초에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상황이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카페를 나와야 했다.


  허구한 날 등장하는 드라마 속 운명적인 만남. 일면식도 없던 두 사람이, 어떠한 계기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며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커지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만큼 실망하고 슬퍼하는 위기의 순간도 연출되지만, 끝내 모든 오해가 풀리고 사랑에 빠지면서 마무리된다.

  드라마는 역시 드라마일 뿐일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은연중에 나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곤 스스로 어리광을 부려본다. 앞뒤 다 생략하고, 모두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있으면 안 될까 하고. 가끔 TV 프로그램 혹은 라디오에 기고되는 사연 등을 보면 특별한 만남이 나온다. 예를 들면 당근 중고거래 중 연인으로 발전했거나, 어렸을 때 이루지 못했던 짝사랑 상대를 성인이 된 후 다시 만나게 돼 결혼까지 골인한 이야기 등이 있겠다.


  이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한 내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운명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독자들도 저마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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