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예비군 동원훈련 중이었다. 내가 3년 차인지 4년 차인지부터 시작해, 저 사람은 머리 스타일이 왜 저럴까, 수풀에 뱀은 없으려나 등등 의식의 흐름대로 온 우주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자의 본능을 건드리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와! 이런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랑 사귀면 어떤 느낌일까!"
무르익어가던 머릿속 여행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같은 조원들이 한 핸드폰 사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요?" 경박스러워 보이는 조원 한 명이 소리쳤다.
"프랑스 사람입니다." 핸드폰을 쥔 남성이 쑥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우와!" 몇몇 사람들이 후한 감탄을 내질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롱디인가?' 하는 짐작이 번쩍이며 뇌리를 스쳐 지나갔지만(롱디란 Long Distance Couple의 준말로, 국제커플을 가리킨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롱디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에야 유튜브나 TV 프로그램에 전 세계 방송이 대중화 돼 있어서 흔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나 이외의 국제커플을 볼 수가 없었다. 운명에라도 이끌리듯, 핸드폰을 들고 있는 그에게 가서 한마디를 가볍게 던졌다.
"저.. 혹시 롱디세요?"
그는 사뭇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곤 입가에 미소가 소리 없이 활짝 퍼지기 시작했다. 그도 내가 롱디인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저도 롱디인데.." 내가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와 그의 교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벙쪄있었다.
"롱디는 국제커플을 뜻하는데, 저돕니다." 조원들에게 덧붙였다.
"와아!!" 그제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리 조원 중에 두 명이나 국제커플이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조원 한 명이 소리쳤다.
수다를 떠는 사이,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며 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하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 우리는 얘기가 고팠다.
"자, 다음 조는 뒤쪽에 일렬횡대로 앉아서 대기합니다." 교관이 지시했다.
흙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 병기를 내 우측 어깨에 기댄 후 방탄모 끈을 풀어 재꼈다. 적절한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나는 짧은 틈을 이용해 먼저 말을 걸었다.
"롱디시라고요?" 이제는 다 아는 얘기지만 적당히 운을 띄어봤다.
"네, 그쪽도 롱디시라고요?" 그도 적당히 받아쳤다.
주변에서 보기 힘든 공통분모 하나가 이렇게 막강했던가. 작게 지핀 대화의 스파클 하나가 금세 활활 불타올랐다. 그의 이름은 이범효였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는 중이며, 프랑스에 유학을 갔을 당시 만난 여자친구와 1년째 연애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여자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사람인지, 언제 본국으로 돌아갔는지, 언제 올 예정인지 등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럼 이것도 아시겠네요? 여자친구랑 동시에 영화를 보고 싶을 때,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동시에 재생 버튼을 누르잖아요?" 범효씨는 실컷 신나 있었다.
"그럼요, 보는 도중에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영상을 멈추잖아요. 그리곤 영화 재생 시간이 몇 분 몇 초인지 재조정하고 다시 신호에 맞춰 재생을 하곤 하죠." 내가 말했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있구나 생각을 했다.
"저희는 기념일날 같이 외식도 해봤어요" 내가 덧붙였다.
"외식을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죠?" 범효씨가 물었다.
"저는 한국에서, 여자친구는 그리스에서 각자 식당을 가서 음식을 주문합니다. 그리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 거죠. 제가 한 번 해봤는데, 보는 눈이 많아 상당히 민망합니다." 내가 머쓱하게 말했다.
"와 이건 또 처음 들어보네요." 그가 말했다.
그 순간 호루라기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다음 조 정렬합니다." 교관이 말했다.
이렇게 우리는 번호 교환을 하고,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언젠가 서로의 여자친구를 소개해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