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한국어 이외의 언어로, 다른 하나의 추가적인 창구를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습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고등학생 때 나의 외국어 영역 점수는 5등급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21살 때 벼락이라도 잘못 맞았는지, 외국인과 대화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회화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할리우드 영화를 자막 없이 본다던지, 영어 소설을 읽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쯤 영어 공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회화를 연습하곤 있지만, 막상 사용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영어는 어떤 쓸모가 있는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가를 하던 중 혼자 걷고 있는 젊은 여성 외국인을 발견했다. 키는 160여 cm로 보였고, 금발에, 체형은 평범했다. 평소의 내향적인 나였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말을 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공부해 온 영어를 사용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유유히 멀어져 가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Excuse.."
그녀가 뒤돌아 봤다.
"First of all, I'm not a stranger. Just I like English. If you are okay, can we talk?" 나는 어정쩡한 콩글리쉬 발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밥을 먹으러 가는 길이라며 같이 가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분식집에 들어가, 각자 김밥을 먹게 됐다. 그녀는 부산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라며, 다음 달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비스듬히 앉아 앞을 보는 건지, 옆을 보는 건지 애매한 자세로 식사를 마쳤다. 카카오톡 아이디를 나눴고, 감사의 인사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틈에, 그녀는 자기 몫을 계산해 버렸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졌으며, 이후 연락에도 답변이 없었다.
한가로운 주말,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괜스레 펜팔 사이트도 들어가 보고, 영어 말하기 카페도 알아봤다.
"음.. 이런 것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지만 참여 의지는 없었다. 그러던 중 '헬로우톡'이라는 언어교환 어플을 접하게 됐다. 당시로선 언어교환이란 표현을 처음 알게 됐다. 언어교환은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모국어를 서로에게 알려주는 것을 의미했다. 영어를 배운다고만 생각했지, 한국어를 알려준다는 생각을 못했던 나는,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바로 어플을 다운로드하고 접속했다. 먼저 내 모국어를 고르고, 배우고 싶은 언어(영어)와 내 수준을 선택했다. 나는 이제 영어가 모국어인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메시지를 할 수 있게 됐다. 하루에도 여러 사람과 영어 대화를 하고, 간혹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내가 동경해 왔던, 영어 회화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날 이후 나는 헬로우톡을 애용하게 됐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언어교환 상대를 찾고 있던 중, 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Anyone up for a call?'이라는 전화상대를 찾는 짧은 내용으로, 20살 그리스인 여성의 게시물이었다. 외모가 아름다워 내 메시지에 답변이 올까 반신반의하며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If you couldn't find someone to call, text me."
그렇게 어플을 서핑하던 중, 그녀의 답변이 왔다.
"Hi, I'm Ria. Nice to meet you."
그렇게 그녀와 첫 연락이 시작됐다. 그녀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언어와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매우 우수했다. 서양인이 한국어를 구사할 때 숨길 수 없는 소리, 소위 혀 굴리는 소리를 감출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발음은 한국인과 유사했다. 그녀의 실력에 홀랑 넘어가버린 나는, 영어 공부는커녕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일상을 나눴다. 수 시간을 통화한 후에야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즐거웠던 대화를 뒤로 하고 마무리 인사 후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하지만 내 경험대로라면 헬로우톡이든 펜팔이든 한계가 있었다. 관계를 이어나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온라인상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들이 할법한 대화를 소진하고 나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리아와의 인연도 사실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난 다시 새로운 얘기 상대를 찾을 뿐이었다.
당연히 며칠간 리아의 연락은 없었다. 나 역시, 특별한 노력을 하진 않았다.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리아의 메시지가 왔다.
"오늘은 뭐 하시나요?"
순간 무척 반가웠으나, 뭔가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무덤덤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으며 우리는 서로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책으로,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리아에게 물어보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며, 마침내 실제로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귀게 됐다. 그녀가 현재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와이프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