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일요일에 가끔 들르는 커피집에선 커피 문외한인 내가 커피 탐험가가 된다.
서울 종로5가 커피집에서 한 여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건,
씁쓸한 맛은 목 뒤로 넘기고, 특이한 커피향으로 풍부한 맛이라며 뇌를 속이는 것.
젊은 남자 주인의 친절한 설명에 특별한 커피라고 짐짓 아는 체하며 문외한인 나를 숨기는 것.
호주, 브라질 또 무산소 발효... 무슨 원두라는 설명에
가보지 못한 커피 밭의 햇살과 바람 등을 느끼는 듯 오감을 속이는 것.
1시간 남짓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고급스런 휴식이라고 믿는 것.
적지 않은 허영심을 섞어 이런 것들에 기꺼이 속아주는 건,
이 때만은 시급한 일을 미뤄도 불안하지, 조급하지 않아서다.
될대로 되어도 좋겠다는 약간의 나태와 나른함 등이 섞이면 나를 '그냥' 둔다.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사투 끝 잡은 황새치를 뜯어 먹힌 채 끌고 온, 노인의 긴 낮잠과 같이...
일터, 아니 인생의 전장에서 시달린 뒤 오는 나른함.
플로리다 헤밍웨이 자택의 고양이들이 보여줬던 오만하고 게으른 발걸음과 같은 속세와의 단절.
말도 꼬물거리는 두 아이가 뽁뽁이 신발을 신고 뽁뽁거리는데, 애들의 건강을 빌어준다.
굳이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그러다 재잘거리는 연인의 뒷모습에 행복을 빌어준다.
커피 한 모금은
에어컨 밑에 앉아, 창 밖으로 열기에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아지랑이가 인생 무대의 조명인듯
세상 모든 게 찬란하다고 노래하는 것.
젊은 남자 주인은 1시간 동안 5000원짜리 커피 6잔을 팔고도 모든 손님과 커피 얘기를 재잘거리고,
손님이 적당히 차지 않은 커피점 안은 여유로이 평안하다.
마지막 한 모금은
이렇게 좋은 곳과 시간과 풍경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가
아무도 몰랐으면 해서 젊은 남자 주인에게 순간 미안한 것.
그리고 열댓번은 들렸던 그곳에서 젊은 남자 주인을 용기 내 칭찬했더니 자기는 직원이란다.
근데 왜 주인처럼 열심히 일하냐고 물었더니, 잠시 생각한 그는 '커피를 좋아해서'라고 했다.
빨리 돈 벌어 커피집 하나 내라고 덕담을 했더니 '그냥 커피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난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언제부터 꼰대가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