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광고인 줄 알았던 전화의 소름 돋는 정체

by 이월


민박집 사장의 휴대폰은 24시간 열려 있는 해장국집 간판과 같다.

하지만 울리는 전화의 대부분은 영양가가 없다.

“사장님, 블로그 상단 노출 보장합니다.”

“포털 지도 등록 도와드려요.”

이런 전화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방어기제가 생긴다. 모르는 번호가 뜨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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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랬다. 평소처럼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대충 훑어보고는 또 마케팅 대행사겠거니 싶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레퍼토리가 좀 달랐다.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 우리 숙소를 섭외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아, 이제는 뮤직비디오로 사기를 치나?’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누구 뮤비냐고 물었다. 상대는 섭외 프로세스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직 로케이션이 내부적으로 최종 확정되기 전이라 가수가 누구인지는 지금 밝힐 수 없다고 했다. 먼저 내가 공간 제공 의사가 있는지 확인한 뒤, 제작사 측에서 시나리오와 장소를 최종 결정하면 그때 정식 계약을 맺고 가수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촬영이 끝나면 나도 그 영상을 숙소 홍보 자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도 잊지 않았다.

우리 집의 레트로한 소품과 가구, 제주 자연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이번 앨범 콘셉트와 딱이라며 간절하게 설득했지만,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가수가 누군지도 모르는 촬영에 내 소중한 숙소를 내어주라고? 이거 완전 신종 광고네’


일단 생각해 보고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고는, 인터넷 쇼핑몰 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친구의 반응은 단호했다.

“야, 절대 하지 마. 촬영 한 번 하면 집 박살 나. 스태프만 수십 명이 신발 신고 거실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닐걸? 장비 설치한다고 벽 긁히고 가구 다 옮겨놓고... 대여비 몇 푼 벌려다 수리비가 더 나와.”

그 말에 나는 안도했다.

‘역시 내 촉이 맞았어. 귀찮은 일은 안 만드는 게 상책이지.’

그렇게 나는 당당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그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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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무심코 켠 TV 화면 앞에서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면 속에는 제주도의 푸른 들판과 함께 너무나 익숙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다른 민박집이었지만, 그곳은 지난번 뮤직비디오 담당자가 우리 집 인테리어를 보며 설명했던 촬영 콘셉트와 소름 끼칠 정도로 유사했다. 요즘 레트로 콘셉트가 유행하면서 우리 민박집이랑 비슷한 콘셉트의 다른 민박집을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집 거실에 놓인 것과 비슷한 질감의 오래된 가구들,

빈티지한 조명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낯익은 배경 속에서 지금 가장 핫하다는 아이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 어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시기상으로 보나 장소의 특징으로 보나, 얼마 전 그 전화가 분명했다.

그 ‘비밀’이라던 가수가 바로 저 아이돌이었다니. 내가 내 발로 톱스타를 걷어찬 셈이었다.

친구의 조언대로 집은 엉망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숙소가 저 뮤직비디오의 성지가 되어 예약이 1년 치는 밀렸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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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일은 실패가 두려워서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일에 반응하는 나의 마인드가 너무 닫혀 있었던 게 문제였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 누구나 일생에 큰 행운이 세 번은 찾아온다는데, 이번 기회는 분명 내 민박집에 찾아온 그 세 번 중 한 번이었을 것이다. 그걸 내 손으로 스팸 전화 취급하며 날려버렸으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은 ‘시도는 해봤으니 쓸 이야기가 생겼다’고 했지만, 나는 제대로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아쉬움’이라는 빈약한 무용담만 남기고 말았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지만, 사실은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자에게만 그 기회가 보인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평소에 이런 섭외 프로세스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두었거나, 낯선 제안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적극적인 마인드가 준비되어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 행운은 그저 '귀찮은 전화'일 뿐이었다.


이미 아이돌은 다른 집 마당에서 예쁘게 웃고 있고, 내 숙소는 오늘도 평상시처럼 조용하다. 놓친 기회가 너무 커서 자꾸 TV 화면에 눈이 가지만, 이제는 자책 대신 이 쓰린 아쉬움을 약으로 삼아보려 한다.

다음에 또 이런 ‘신박한’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땐 의심보다 설렘을 먼저 꺼내 들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때는 정말로 100% 확률의 광고 전화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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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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