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부터 열까지 잘 맞는 친구, 연인 관계는 분명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하지 않죠. 모든 걸 잘 아는 가족에게까지도 등을 돌리는 일도 있습니다. 다 안다고 잘 맞는 것도 아니고, 잘 맞는다고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볼 수도 없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관계가 원만하고 부드럽게 맺어지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확률로 한 사람의 인내와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사귀는 걸 어려워했던 저는 친구 사이의 정치질에 이용당한다고 해도 먼저 다가와 준 친구들에게 마음대로 끌려다니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건 중학교 때도 변함없어서 그러다 상처를 받고 혼자 다니려고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좋은 언니들과 동생들을 만난 덕에 제대로 된 교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안학교는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대학교에서의 대인관계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벽이 높았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대학교에서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보다 주변의 관계에 그 기준을 맞춰 끌려다니기 바빴고, 그 결과 3학년이 되고 나서는 관계를 맺는 일에 탈진해 통학을 하며 기존에 맺었던 관계를 단번에 끊어냈습니다. 순수하게 사람들이 좋아 관계를 맺었다면 지칠 일도 없었겠지만, 어느 정도 거리는 두면서 동아리, 팀플, 소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몸과 마음을 점점 지치게만 했습니다. 저는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드넓은 캠퍼스에 홀로 남는 것은 싫어 같이 다닐 친구는 원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도 들었죠.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순적인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하고 들어주며 많은 관계를 유지해 오다 놔버린 거죠.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대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상처를 받죠. 어릴 때부터 아빠에게 늘 실망했고, 우울증으로 불안정한 엄마에게 기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일정한 선을 쳐 놓았습니다. ‘나’라는 존재와 ‘가족’이라는 존재를 동일시하지 않았고 분명한 ‘남’으로 인식한 겁니다, 대학 시절부터 엄마를 힘들게 하고 직장을 다닐 때도 조증으로 인한 돌발행동으로 자주 문제를 일으킨 언니가 형부를 만나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못해 엄마를 괴롭게 만든 걸 보고서도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은 건, 그런 저 스스로의 대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형부가 어떤 문제를 일으켜 엄마가 언니에게 확인 전화를 하자 언니가 전화로 미안하다고 하며 울었다고 했을 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간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들어도 그저 그렇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어느 날 아빠가 갑자기 사라져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죠. 가족에게 이렇게까지 냉정해진 제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저를 보호해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선을 넘어서도 상처받지 않고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저는 이제까지 절 지켜준 방법을 바꿀 용기를 내는 게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예외를 알려준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먼저 다가와 준 그 친구는 엄청난 솔직함으로 절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솔직함 때문에 저를 향한 친구의 순수한 우정 또한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고, 싫은 것과 좋은 것을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친구도 그렇게 했고, 그 사이의 거리는 함께 대화를 통해 좁혀 갔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인생의 절친이 됐죠. 저에게 소중한 관계의 가치를 알려준 친구 덕분에 지금은 사람들을 밀어내는 태도를 조금씩 줄여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평생 몸에 익어버린 습관은 바꾸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기 위해서 이제는 선을 넘어 한 걸음을 내딛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