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과 질투는 비슷한 느낌이 드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를 보면 명백히 다른 뜻을 가지고 있죠. 질투는 주로 연인 사이에서 많이 쓰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되는 걸 보면 미워하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마음과 행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럼 부러움은 어떤 감정을 뜻하는 걸까요? 사전을 보면 부러움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거나,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제 친구의 아빠를 보고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빠와는 말 그대로 정반대의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기까지 했습니다. 친구의 아빠는 평생을 교사로 성실히 근무하다가 최근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고도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분이었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며 가족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깊은 신뢰와 애정을 쌓는 분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족의 기둥이 되어주고 있었죠. 깊이 들어가 보면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친구 집에 놀러 가 친구의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다 보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늘 그래왔다는 듯 조금의 이질감도 없는 그 분위기는 정반대에 있는 저희 집의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죠.
남자가 무조건 한 잡안의 경제적 기둥이 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여자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고, 요즘은 맞벌이도 흔하니까요. 다만 집안의 분위기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남자가 경제적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은 그런 경우였습니다. 옛날부터 남자가 돈을 벌었던 한국의 사회적 구조상 여자는 그런 남자를 서포트하는 역할을 하며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았습니다. 저희 집도 전형적으로 그런 모습이었고, 가부장적인 친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 정도가 조금 심한 편에 속했습니다. 아빠가 아무리 술을 먹고, 가족에게 민폐가 되는 행동을 해도 엄마는 항상 아빠의 식사를 차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일을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제가 차려주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일에 불만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딸이 아빠에게 밥을 차려주는 일은 당연히 해줄 수 있는 일이고,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보답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집니다. 제가 아빠에게 밥을 차려주는 경우는 대부분 아빠가 전날 술을 먹고 들어와 늦잠을 일어난 후나,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있다가 밥때가 되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였으니까요.
한 가장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돈을 버는 일은 가족을 향한 노력이자 애정의 표현이고, 가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가족도 그런 가장의 노력에 대한 보답과 고마움의 의미로 식사를 차려주고 집을 청소하는 거겠죠. 그러나 가족을 위한 경제적 지원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집안일도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에게 불안을 가져다주며 민폐를 끼치는 가장에게 식사를 차려주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런 상황이 될 때마다 친구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제가 부러움이란 감정을 가장 크게 느끼는 건 다른 때가 아닙니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얼굴에 상처를 달고 술냄새가 가시지도 않은 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빠를 위해 식사를 준비할 때입니다.
오로지 아빠가 아빠이기 때문에 딸로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마음을 바로 잡습니다. 돈을 잘 벌어오고, 술을 안 먹고, 늘 가족을 안심시켜주는 아빠만을 사랑하겠다는 건 잘못된 마음이니까요.
질투와 부러움의 차이는 뭘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질투는 어딘가 그 어감과 단어의 쓰임새가 부정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와 반대로 부러움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즉, 소망하는 마음이 더 들게 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길을 열어주는 감정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저는 친구의 아빠를 보고 질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저 강한 부러움을 느꼈죠. 우리 아빠도, 우리 가족도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갈수록 커졌습니다. 그건 어쩌면 내 속마음 어딘가에는 아직 아빠에 대한 조금의 애정과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나 스스로가 외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기로 했습니다. 부러움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삼길 바라는 제 내면의 목소리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