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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그시 Nov 06. 2024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것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이해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여행’입니다. 사전적 정의로는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제 삶으로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녔던 대안학교의 1년 커리큘럼에는 반드시 여행 일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1년에 최소 4번은 단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중 한 번은 해외여행으로 장장 3개월간 떠나는 장기여행이었죠. 일본, 미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나라를 다녔습니다. 특히 미국의 유명한 도시와 관광지는 전부 다 가본 것 같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지인마다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는데요. 사실 저는 대안학교에서 여행의 재미를 얻기보다는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다만, 이건 학교의 책임이 아닌 전적으로 제 개인의 성향 문제였지만요.

저는 대안학교에 다녔던 시절 지극히 내성적이고 아직 엄마 품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아이였습니다. 다른 또래보다 미성숙했기 때문에 2주에 한 번 돌아오는 귀가일 만을 손을 꼽고 기다렸을 정도죠. 그런데 3개월간 강제 해외이동수업이라니. 어린 저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여행을 가서도 집에 가고 싶어서 혼자 우는 날이 다반사였고, 당연히 그랜드 캐니언이나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저에게 여행이란 그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제주도라던가, 가까운 해외 정도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일본에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여전히 부정적인 형태로 마음에 남아 있는 탓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있는 ‘아빠’는 늘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마다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아빠가 여행을 가지 말라고 막는 건 아닙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건 아빠가 눈치를 줘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이 또한 마음의 문제죠. 아빠는 우리 가족에게 있는 듯 없고, 없는 듯하지만 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듯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입니다.

저와 가장 친한 친구는 늘 저와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늘 제가 사정이 안 된다고 거절했기 때문이죠.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행을 갈 돈은 충분히 있는데도 친구의 여행 제안에 대답이 흔쾌히 나오지 않는 걸 보고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하니 아빠의 존재, 엄마의 존재가 사실 늘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아빠가 술에 취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와중 나는 친구와 맛있는 걸 먹으며 좋은 걸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없는 사이 술 취한 아빠를 혼자 감당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더더욱 떨어지지 않았죠.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가려고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잠깐 잊는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계속되고 있으니 불현듯 떠오르는 아빠의 존재는 즐거운 마음을 조금씩 앗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엄마와 제가 유일하게 바람을 쐬기 위해 하는 건 근처 맛집에 가서 어쩌다 한 번 밥을 먹는 거죠. 그렇게 엄마와, 친구와 몇 시간이라도 평안한 시간을 보내면 그것만으로도 다시 걸어갈 힘이 났습니다.

저와의 여행을 간절히 바라는 친구에게 이제는 제 가족에 대해 전부 말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돈을 모아야 해서 못 간다고 하면 서운한 마음만 깊어질 거고, 그렇게 멀어져 버리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아빠를 그저 무시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는 조금 더 아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언젠가는 친구와 해외로 여행을 가고 싶고, 엄마와도, 우리 가족 모두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지금 어떤 모습이고 서로가 그저 서로를 견디는 관계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으니까요. 지금 흔쾌히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 무거운 마음이 그 증거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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