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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화실.

by 잉크 뭉치

식당 알바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일급으로 받는 알바터에서 돈만큼 확실한 행복은 없는 듯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야 해서 유독 피곤이 몰려왔다.


옷과 바지자락은 설거지를 하다 물에 젖었고, 핸드폰을 볼 겨를도 없이 멍하니 걸었다. 쑤시는 다리를 끌며 땅만 바라보다가, 내가 그렇게 걷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문득,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그 숲 속의 고요한 아침과 따스한 햇살이 떠오르며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와 인도 위로 차들이 지나가고, 이곳저곳에 건물과 간판이 빼곡한 도심 속에서 저런 숲 속 풍경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무래도 핸드폰으로 뉴스나 영상을 넘기며 나오는 각종 콘텐츠들에 실증과 염증을 느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그림에 시선을 빼앗길 리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가게는 전에는 없던 새로운 곳처럼 보였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내 시선은 어느새 창문에 붙은 "그림 판매합니다."라는 문구에 멈췄다.


그 문구를 눈에 담은 순간, 가게 앞에 세워진 홍보 배너의 "성인 취미 미술"이라는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처음보는 가게, 시선을 사로잡은 그림, 그리고 '취미 미술'이라는 단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정보들이 뒤엉키는 사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색다른 분위기에 이끌려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이 단순히 전시용인지, 실제로 판매하는 것인지, 가격은 얼마인지도 모른채 나는 결국 가게 문을 열어버렸다.


가게 안에는 각종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분위기는 굉장히 조용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카페 같았다. 사람이 없고, 깔끔하게 정리된 아늑한 공간에서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문을 닫고 "혹시.. 계시나요?"라고 말하자, 오른쪽에 달린 커튼이 살짝 들리며 한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남자는 키가 컸다. 내 얼굴 하나에 반 정도를 더한 높이였고,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림을 판다고 적혀 있던데요."


"우선 신발을 갈아 신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어 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신발장과 슬리퍼가 보였고, 나는 급히 신발을 갈아 신고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그림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은 어떤 곳인가요?"


"그림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 모여 각종 그림을 배우고, 전시하기도 하는 곳입니다. 저도 기왕 그리는 김에 팔기도 하고요."


나는 조심스럽게 아까 창 밖에서 본 그림의 가격을 물었고, 대략 10만 원 후반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림 크기가 클 뿐만 아니라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돈을 쓰기엔 망설여졌다.


"주로 성인들도 와서 그림을 그리나요?"


"70대 할아버지가 오셔서 그림을 배우시기도 하고, 초등학생들이 와서 그리기도 해요. 20~30대 분들도 종종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는 달마 그림을 시작으로 만화 캐릭터, 풍경화, 아이돌 인물화, 초상화 등 다양한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순간 나도 이 모임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여러 생각들 때문에 차마 깊이 묻지는 않았다. 대신 모임에 대해 가볍게 몇 가지 질문만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림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그림에 관해 질문하면 남자가 대답해 주었고, 때때로 내가 그림을 그렸던 경험담을 풀며 서로 공감대를 쌓아갔다. 그는 갤러리를 안내하며 작품을 보여 주었고, 나도 연필을 쥐고 내 그림을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가게가 이번 달에 새로 이전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로 생긴 가게가 맞았구나 싶었고, 아직 이 고향 거리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화가 잦아들자, 나는 그저 가게를 나서는 것이 미안해져 언젠가 꼭 그림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만남을 기약했다.


문을 열고 나와 고개를 돌렸다. 살구색 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커다란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걸린 간판에 선명한 글씨까지도.


‘낭만 화실’


"저게 가게의 이름이구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치 연한 아카시아 향에 젖은 기분이었다.

그림이란, 이젠 내게 낭만이자 취미이니까.


그 남자와 나눈 그림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만큼 유독 깊이 기억에 남았다.


오후 4시의 햇살이 나를 비추며 곧 저녁이 찾아올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조금 더 걷자 놀이터가 보였다. 초등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놀며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장난을 치고, 게임을 하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벤치에 앉아 지켜보는 할머니들의 옅은 미소도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그림을 좋아했던 내가 떠올랐다. 순수했던 그 꿈을, 성인이 된 지금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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