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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야 하는 마흔한 번째 이유

by 김추억

내게는 살아야 할 이유들이 즐비하다. 그냥 그냥 하루하루 무심히 살아가다가 문득 살아야 할 이유가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삶의 이유는 삶의 목적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좀 다른 성격 같다. 나는 삶의 목적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자 하는 목적이나 목표가 없다. 단지 죽지 않고 버티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살아야 할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조금은 바쁘다.

그런데 어느 철학자들의 근사하고 대단한 말들은 닮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정도 수준의 사색을 귀찮아한다. 삶의 깊이를 가지지 못한 아주 낮은 수준이라는 걸 스스로 안다.

왜 사느냐? 누군가 내게 물으면 나는 해년마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굉장히 소박한 삶의 이유같이 들리겠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남들이 웃을만한 한가한 이유가 나만의 사연을 가지게 됨으로 거창한 이유가 되기도 하고 절박한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카시아 향기를 맡기 위해서! 그것은 내가 살아야 하는 서른여섯 번째 이유이다. 5년 전, 병실에 누워만 있었던 때에 매우 간절히 바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릴 적 맡았던 아카시아꽃 향기가 무척 그리웠다. 그 꽃송이 하나를 따서 내 입에 넣어 달큰하게 씹을 수만 있다면!

나는 한 번 마음이 꽂힌 것에는 빠져나올 방법을 도통 알지 못한다. 퇴원을 하고 부랴부랴 아카시아꽃을 찾아갔지만 아카시아꽃은 다 시들어 버리고 향기는 증발해 버린 뒤였다. 아카시아꽃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쭈그리고 앉아 얼마나 펑펑 울어버렸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당시 아카시아꽃에 집착한 건 맞지만 단순히 아카시아꽃만을 집착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삶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 같다. 아카시아꽃을 핑계 삼아 몹시 살고 싶었는데 그 향기를 맡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큰 상실감과 좌절이 일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연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펑펑 쏟아졌던 나의 눈물과 나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 찢기는 듯한 내 심장의 아픈 등이 나를 달래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이런 식이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가면 나는 내가 살아야 할 마흔한 번째 이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알았다. 이 이유도 꽤 오래전에 발견한 이유이다.

목마른 식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것이 마흔한 번째의 이유다. 소소한 삶의 이유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구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이 이유가 결코 소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살아야 할 위대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비가 와줘서 옥상의 다육이와 이파리식물들은 통통하고 건강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늬 둥굴레가 나를 몹시도 기쁘게 했다. 이 녀석을 보기 위해 나는 산다.

누가 붓으로 하얀 물감 덧칠한 것 같다.
2024년 4월 15일의 둥굴레꽃, 쌀튀밥을 닮았다.

밖에 있는 식물들은 하늘이 키우지만 문제는 집안에 있는 식물들이었다. 여기저기서 하나씩 꺾어서 준 식물들을 수경재배 하고 있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리필해 주었다.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이고.

목숨이 까딱까딱
구원자가 왔으니 이제 안심해
식물들은 플라스틱병보다 확실히 유리병을 좋아한다. 유리병보다는 확실히 흙을 좋아한다. 뿌리가 처해진 환경에 따라 성장에 차이를 보인다.수돗물 리필완료, 병은 다음에 씻어줄게.

내가 살아야 하는 마흔한 번째 이유,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이 녀석들 때문에 내가 못 죽는다. 나와 생명이 연동되어 있는 느낌마저 들기에 죽일 수 없다.

내가 와서 녀석들이 안도하며 즐거워하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들은 이처럼 유치하지만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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