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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가족

by 김추억

"기순아! V자 대형 유지해, 자꾸 뒤로 빠지면 힘도 더 빠진다고! 끼룩끼룩 힘내라 우리 딸낭구!"


"아빠, 노스코리아 벗어났으니까 강화도 저 논에서 잠깐 쉬어가면 안 될까요? 나 몸살 났다고요."


"안돼, 기상청에서 오늘까지만 맑고 따뜻하대. 낼부터는 한파주의보란다. 미적미적 대다가는 내일 추위 속에 고생하며 날아야 한다고. 오늘 저녁 순천만 갈대밭까지 날아가서 거기서 푹 쉬자. 거기서 겨우내 푹 쉴 것 생각하고 힘을 내자 딸낭구!"


"그나저나 여보, 당신 너무 선두에서 난 지 오래되었어요. 이제 선두 자리 교체해요. 제가 앞에서 날게요."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도 연약한 여자예요.

제가 앞으로 갈게요. 아버지, 저랑 자리 교체해요. 끼룩끼룩"


"어머 끼룩끼룩 우리 기철이 철들었다. 이제 기순이만 철들면 되겠다. 시베리아에서부터 기순이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는데 역시 우리 집 장남 든든하다. 고맙다."


"엄마! 대 놓고 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얏!"


"어머, 엄마가 긴 비행에 잠시 정신이 자유로워져서 마음의 소리가 나와버렸나 봐. 우리 중2병 기순이 덕분에 노스코리아를 무사히 지나왔지 뭐야. 기순이 무서워서 아무도 안 건들잖아 그치? 우리 딸 고마워."


"그래, 기순아. 아빠도 기순이한테 고맙다. 낙오 없이 같은 속도로 날아주려는 것만으로도 아빠는 기순이에게 고맙다. 잘하고 있어 우리 기순이"


"아버지, 뒤에서 이제 좀 편안하신가요? 제 날갯죽지 V자 광배근이 요즘 너무 멋져졌어요. 확실히 날갯짓이 달라졌죠?"


"기철아, 너도 이제 다 컸구나. 기철이 날갯짓할 때마다 아버지 몸이 붕붕 뜬다 떠. 상승기류 지대로다 지대로. 힘이 70%쯤 덜 든다고."


"여보, 우리 기철이가 언제 이리 든든해졌을까요? 내가 눈물이 다 나려고 그래요 끼룩끼룩. 힘들게 낳아서 품어준 보람이 있네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는 든든한 아들에 나를 닮은 이쁜 딸낭구 있고, 그리고 여보가 있으니 내가 기러기 아빠 중에 최고로 행복하네요. 인간들 세계에서는 기러기 아빠가 외롭다고 하더구만 기러기 세계에서는 기러기 아빠가 최고네요 최고 끼룩끼룩."


"오늘 밤에는 순천만 갈대밭에서 옹기종기 따뜻하게 모여서 푹 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도 안 힘드네요. 그나저나 순천시가 살기 좋은 도시 몇 년 연속 1위였는데 이번에 세종시에 1위 뺏겼다면서요?"


"그러게요. 세상에는 참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뭐 그래도 여전히 순천이 철새들이 살기 좋은 도시 1위를 지키고 있으니깐 우리가 지금 순천으로 날아가는 거 아닙니까. 천혜의 자연환경, 태고적의 신비를 우리 철새들을 위해 유지해 주는 순천시가 최고네요! 순천만 습지가 뭐 유네스코에 지정되어 있다고 하던데... 끼룩끼룩, "


"아빠! 좀 조용히 날면 안 될까요! 아빠가 무슨 순천시 홍보대사도 아니고!"


"여보, 기순이가 요즘 예민해요. 버릇없어도 좀 참아줍시다. 쉿, 이제부터 조용히 날자구요."


"엄마! 대놓고 흉보지 말라구요 쫌!"


"김기순! 너 엄마 아빠한테 그게 무슨 버릇이야? 중2병이면 다야? 엄마 아빠도 갱년기 시작되셨어.

다 참고 사시는 거라고! 사춘기 그거 벼슬 아니니깐 적당히 해라. 혼난다 끼룩끼룩."


"자, 기순이 말대로 입으로 힘 빼지 말고 기러기들의 천국, 꿈의 도시 순천으로 쭉 날아가 보자! 강화도에서 순천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기순아, 아빠 상승기류 잘 타고 잘 따라와! "


딸낭구: 딸내미의 방언 (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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