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이 눈을 뜬 건 새소리 때문이었다.
이중창에 암막 커튼까지 친 창가에서 새 한 마리가 가깝게 떠들었다. 혜진은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AM 5:10
혜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일찍 피곤하다.'
혜진은 더 잠을 청했다. 여러 마리의 새가 아닌 단 한 마리가 들려주는 새소리를 혜진은 자장가 삼아 다시 잠들었다.
혜진이 늦게까지 자느라 숙소를 나선 시각은 오전 10시였다.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송해면 솔정리를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니 단 5분 거리였다.
송해면 솔정리 마을에 도착한 혜진은 그곳에서 어젯밤 자신이 묵었던 숙소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엄마 품에서 엄마의 자장가 소리에 푹 잔 기분이었다.
혜진은 농협 주변에 주차를 하고 걸어 다녔다. 면사무소를 발견한 혜진은 면사무소 입구에 적힌 문구를 보고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이 떠올랐다.
<면민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송해면>
모두가 잘살고 행복한 송해면에서 혜진은 엄마의 삶이 눈에 밟혔다.
혜진은 엄마가 다닌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교 건물 벽에 박힌 문구를 보며 또 엄마를 떠올리는 혜진이었다.
<푸른꿈을 가꾸는 송해초등학교>
'엄마의 푸른 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꾸지 못한 그 푸르렀던 꿈이 지금은 어디서 무슨 색으로 변해 있을까.'
혜진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팠다.
자신의 꿈도 어딘가 처박혀 있을 텐데 혜진은 그 꿈에게 미안했다.
엄마가 뛰어놀았을 운동장이 보였다. 혜진은 달리기를 잘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운동신경이었다. 혜진은 티 없이 맑게 놀기만 했을 시절의 엄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저 멀리 학교 중앙 입구에 걸려 있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모두가 주인공인 행복한 송해학교>
혜진은 생각했다.
'자기 삶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자기가 주인공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음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르쳐 주었지만 사느라 바쁘고 지친 사람들은 자신을 잃어버린 채 누군가의 조연, 이 세상의 엑스트라로 사느라 불행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신과 엄마의 삶을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쳤고 또다시 행복추구권을 떠올렸다.
11월 중순에도 수확을 하지 못한 논들이 여럿 되는 것을 혜진은 발견했다.
'무슨 사연일까'
무언가를 심어 놓고 거두지 않는 일이란 이렇게도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을 혜진은 생각했다.
강화도는 정말 북한과 가까운 모양이었다. 북한 소음 방송 피해 지역이었다. 혜진은 자신의 엄마가 정말 시집을 참 멀리도 갔구나 싶었다.
혜진은 엄마가 살던 동네를 지근지근 구석구석 다 밟고 다녔다. 엄마가 뛰어 놀았을 뒷동산, 골목, 오래된 나무와 오래된 집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엄마의 흔적을 다 느끼려고 발버둥을 쳤다.
혜진은 논두렁에 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어디게요?"
"어디길래, 어딘데?"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
"어? 거까지 갔냐? 집이 이제 없을 것인디 그 미영이네집 찾으면 그 앞이 바로 집이었어."
혜진의 엄마는 혜진에게 앞으로 그렇게 보고 싶은 거 보러 다니면서 살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혜진은 최근에 눈에 보이는 것마다 詩가 되는 마법에 걸렸다. 강화도 조용한 마을 하나를 거닐면서도 수많은 詩들이 혜진을 찾아왔다.
혜진은 얼마 전 새아빠와의 통화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아부지, 지금 소백산에 단풍 들었던가요?"
"아, 몰러. 엄마가 아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밑에서 캠핑치고 있다. 너는 세상을 어찌 사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요즘 시를 쓰고 살어."
"어, 그래?"
"아야 바다 가면 바다를 읽고 바다 시를 쓰고 개울을 보면 개울의 그 물 철렁철렁 소리 듣고 나한테 막 뭐라고 그래."
"엄마가 시인이구나."
"음."
"아부지가 좀 받아 적어주고 그래요."
혜진은 강화읍 송해면 솔정리에서 작은 솔방울 하나와 보석 같은 돌 하나를 챙겼다.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이곳은 엄마의 고향이기에 누가 뭐라고 하면 지연, 혈연을 권리로 내세우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꽃과 같은 솔방울 향기와 감사의 돌 하나면 혜진이는 엄청난 행복을 추구한 거라 생각했다.
날씨가 혜진이의 외투를 벗긴 너무나도 따스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