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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못한 말

by 김추억

"힘들어요." 커다란 사내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내게 힘들다는 말을 꺼냈어요. 그 사람이 힘들다는 말에 나는 몹시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합니다. 안절부절못한 내 마음은 순간 고온에 타들어가 화상을 입고 이내 까만 숯이 되었어요. 머릿속은 자욱한 흰 안개로 뒤덮여 갈바를 알지 못하고 있었어요. 안아줘야 할까,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어쩐지 오히려 서너 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어요. 나는 순간 언어를 잃어버렸고 그 상황 속에서 증발하고 싶었어요.

익숙하지 않은 상황,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상황이 있어요. 그 상황은 상대의 고백의 말로 시작되어져서 아무런 대응조차 못하는 나의 어설픔으로 채워지며 결국 아무런 조치도 못하고 무력하게 상황이 종료됩니다. 그리고 그 사내의 힘겨움과 헤어지고 나서는 내 힘겨움으로 이어집니다. 힘들다고 했던 그의 말이 귓가에 맴돌고 그의 안쓰러운 표정도 잔상으로 남아버려서요.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해 주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온 내가 싫어져서입니다. 나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통 그 방법을 알지 못해요.

나는 힘들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아니, 힘들다는 내색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힘들다는 말은 어떤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일까요. 힘들다는 말은 누구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일까요. 나는 아직 '힘들어요'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다음 이어지는 상황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나를 위해 울어주는 이가 있을까요. 나를 안아주는 품이 있을까요. 나를 연민하는 눈빛이나 있을까요. 겁이 나서 그 말은 못 하겠어요. 힘들다는 말을 하면 누군가 나를 매우 야단치고 혼낼 거 같거든요. 애써 힘들다고 말했는데 세상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외로움에 살아가질 일이 걱정입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를 배우지 못하였어요. 정글북의 모글리가 나보다 나아요. 동물들의 손에 자란 인간의 아이예요. 아무리 학습하려 해도 나아지지 않고 있어요. 나는 내 아이를 위해 공부하려고 사놓은 육아서를 나의 발달을 위해서도 하나씩 꺼내 읽어요. 힘들다는 말을 억지로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말을 꺼내어 놓는 자체가 너무 힘든가 봐요. 그러니 내가 해보지 못한 말을 들었을 때 대처도 힘들 수밖에 없어요. 어떤 자존감이 있어야 그 말을 뱉어낼 수 있을까요.

나는 지금 몹시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 사내가 나를 야속하게 여길까 봐요. 그 사내에게 변명을 하고 싶은데 아, 슬프게도 변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요. 변명하면 혼날 것만 같아요. 힘들다는 말은 어떤 편안함 속에서 나오는 소리일까요. 누군가에게 안길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나요. 기대고 싶다는 말은 사람에게 해도 되나요. 나는 기대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오히려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게 되었어요. 힘들다는 말 대신에 오히려 밝은 웃음을 지어요. 난 고장 난 인간인가 봐요. 너무 이른 나이에 부러진 감정의 뼈가 그대로 굳어 버렸어요.

힘들다 했던 그 사내가 아무 일 없듯이 나를 대해 주는 모습을 볼 때까지는 나는 계속 전전긍긍할 거예요. '힘들어요'라는 말은 정말 어떤 감정이 되어야만 할 수 있나요. 누구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인가요. 있을 거예요. 분명 어딘가 힘들다는 말도 못 해 본 사람이 살고 있을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을 찾아가 그 사람에게 말할 거예요. 힘들다고요.



2024/3/8 AM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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