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지만 어떤 글을 쓸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날이 있다. 특히 글쓰기를 누군가에게 지도 받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으로 생각된다. 목적이 있는 글쓰기를 배운 나로써는 감정을 쏟아내며 동시에 절제하는 글쓰기는 다소 어색하다. 그리고 이 글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를때 불안감도 함께 찾아온다. 글을 쓰는 동안 내 감정을 바라보면서 이건 참으로 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삶에 대한 고민이 없이 살아가는 순간도 있고, 또 어느 시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아지기도 한다. 또 그 걱정은 각자의 사정마다 셀 수 없이 많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가끔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고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불러오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순간을 한 번쯤은 넘겨보고 잘 살았다 생각하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 뿐이랴, 잘 해결된 문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니며 나 이렇게 잘 살았다고, 혹은 힘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고 말한다.
내 글쓰기는 그렇다. 내가 글로 남길 수 있는 것은 마무리된 것들 뿐이다. 감정도, 사건도 모두 그렇다. 그렇다고 그게 꼭 끝난 것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내가 이겨낼 수 있는 일들도 포함된다. 여전히 힘들고 아프게 지내고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글을 쓴다. 그러면 너무 감정적이지도 않고 또 너무 이성적이지도 않은 글이 나오는 것 같다.
호밀밭의 반항아, 2017
내 글은 차갑기도 하고 그 안에서 따뜻함을 찾았으면 한다. 한겨울에 전기장판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쌀쌀한 가을밤의 느낌이 더 많이 드는 것 같다. 언젠가는 조금 더 따뜻한 글을 쓸 수 있는 때가 오면 나도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놀랍도록 이성적인 순간에 감정적일 수 있고, 또 감정적인 순간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는 방법은 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잘 사는 법은 아직 모른다. 몇몇 아름다운 그림을 보며 감동을 느끼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의 감정에 깊게 공감하지 못하고,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글 속의 나는 썩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름 감정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두 요소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것이다.
이성은 항상 근접한 정답이 있다. 감정도 그런 정답이란게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인생에 정답이란게 없다고들 말 하지만 모습은 다 달라도 정답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매 순간 우리는 정답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언제는 최악의 수를 두기도 하고 또 그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뱉은 많은 말들과 글도 그랬다. 이때 왜 이런 말을 했을까 혹은 왜 이런 문장으로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을까. 가끔 가시돋힌 문장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기고할 때 마다 스스로 이성적이라며 합리화하고야 만다. 결국 그렇게 약간은 감정적인 글을 쓰게 된다. 또 어느날은 감정을 숨기고 속상하고 부끄러운 감정으로 꽁꽁 숨겨진 차가운 글을 기고하고 나서도 후회한다. 이렇게 맛없는 글을 밖에 내보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문장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어떤가. 매일 글을 쓴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을 주듯, 매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집중해서 쓰는 글도 어떤 날은 이성적이고 언젠간 또 감정적인데 사람과 다를까. 항상 같을 수 없고 달라지는 모습에 만족하고 지내다 보면 더 가득해진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러니 이정표를 찾지 말고 내가 걷는 곳이 길이라 생각하자. 누군가는 날 따라 걸어줄테니까. 의외로 누군가 내가 갔던 길을 이미 걸었기도 했을 거다. 괜찮은 글을 쓰는 사람이면, 나도 괜찮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