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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생 Aug 16. 2024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는데

잠시 멈춰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랑하지 않고 스쳐갈 수 있었는데,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걸음을 멈췄다. 다들 그렇게 시작하나 보다. 만남과 사랑은 다른 거니까, 마음만 끌리지 않으면 아무 일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예뻐 보인다고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을까. 아닌가, 나비처럼 내 앞에서 살랑거려 눈길이 갔을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 멈추게 되었다.


빅피쉬, 2003


  어느 순간 찾아온 것인지, 나도 모르게 멈추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행히도 내가 멈춘 그 자리에 그 사람도 멈춰 있었다. 아마도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야기했다. 사랑의 세상은 꽃밭 가운데 피어있는 가장 예쁜 꽃이고 내 세상은 짙은 어둠에 별로 가득 채워진 밤하늘의 달이었으니, 부족할게 없었다.


  그 사람은 처음엔 같은 점만 보려고 했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다른 점이 보였고 이해하려 했다.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틀렸다고 말한다. 더 이상 사랑이 없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 사랑이 참 아름다웠다 생각된다. 사랑만 아름다웠을까, 이별도 아름다웠다. 나는 그 순간마저 사랑했으니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너를 아름답게 여긴다는 것. 그게 이 감정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너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네 옆에 주저앉은 건 그런 이유다. 아마도 나에게만 보이는 너의 아름다움이 있겠지. 그리고 너도 나에게 그런 점을 찾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 날 바라보는 눈빛을 참 좋아했다.


  좋은 것만 가져가려고 한다. 너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일 거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너를 좋은 방향으로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일 거니까. 부정적인 마음만을 너에게 주고 나는 이기적으로 좋은 마음만 가져가겠다. 그래야만 계속 사랑할 수 있으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음을 여기에 다 적어두려 한다.


  아쉽지만 그만둬야만 했다. 마음은 남아있지만, 사랑할 힘은 남아있지 않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너의 마음보다, 나에 대한 신경을 더 바라기 시작했다. 사랑이 그런 형태면 안되니까. 잊고 싶어도 늘 먼저 잊는 건 잊잔 그 마음뿐이다. 그래서 자꾸 올라오는 내 마음을 더 이상 가만둘 수 없다. 사랑을 그만두는 건 아니다.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무엇을 멈추는지 나도 모르지만 일단 그만두려 한다. 이 글은 마침표다.


  난 여전히 사랑에서도, 글쓰기에서도 모자란가 보다. 글의 마지막을 다른 사람의 언어로 채운 다는 건 다소 어색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의 부족한 표현을 이보다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나 도망쳐 놓고서 결국 나는 다시 내 말을 할 기회에서 도망친다. 이것도 사랑이기를.


부디 우리가 도망쳐온 모든 것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기를. 결국 우리가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지 않기를.
-이동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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