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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케이션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사실은 안 가는 이유

by 말복



#워케이션


요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단어는 마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 된 것 같다. 노트북 한 대 들고 제주도 카페에 앉아 일하는 모습, 한적한 자연 풍경 아래 온라인으로 회의하는 모습, 또는 아늑하고 쾌적하게 꾸며진 숙소에서 업무와 휴식을 동시에 즐기는 모습까지. 일과 휴식의 완벽한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들이 꽤 부럽다.


그렇지만 워케이션을 떠나볼 생각은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다. 아니, 안 하려고 애쓸는지도 모른다. 워케이션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며 마주한 사진 속 프리랜서들은 행복해 보였다. 내가 워케이션을 갔다고 상상해도 행복했다. 특히 바다를 비롯해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한적한 곳에서 여유롭게 일하는 게 꿈이었다.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에는 시골에 내려가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나 설레는 마음으로 정보를 들여다보다가도 현실로 넘어오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통장 잔고나 달력이 그렇다.


웹툰 일을 그리 오래 하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웹툰 프리랜서가 되고서 1박 넘게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다. 개인 작가, 스튜디오뿐 아니라 해외 콘텐츠 회사 만화부와도 협업하므로 더더욱 그렇다. 주간 마감이 기본 원칙이기 때문에 스케쥴 조정에 한계가 있다. 말이 조정이지, 내가 일을 안 해도 주간 마감은 이루어져야 하므로 다른 작가님을 찾으란 소리와 같다. 장기 계약을 해놓고 휴가를 위해 빼달라고 하는 작가를 계속 쓸 회사는 없다.


물론 워케이션은 쉬러 가는 게 아니라 일도 하고 쉬기도 하는 거지만 본격적인 웹툰 일은 할 수가 없다. 그러려면 장비를 챙겨야 한다. 여행 가서 간단한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2박이 넘어가면 액정 타블렛을 필수로 챙겨야 한다. 그 크기는 캐리어보다 크고, 무게는 캐리어보다 못 하지만 백팩에 들어가지 않는다. 손에 들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버스에 태울 수도 없다. 그러다 실수로 고장이라도 나면 a/s는 쉽지 않은데 당장 마감은 해야 해서 울면서 KTX를 타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최악의 상황 중 하나다.



아무튼 그렇다 보니 워케이션을 갈래도 1박이 한계다. 어떻게든 외부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최근에 만들어봤지만, 그것도 2박이 한계로 보인다. 2박 3일이면 바쁜 대기조 뚜벅이인 나에게 휴식을 즐길 시간은 몇 시간이 되려나 싶다. 숙소에서도 거의 테이블 앞에만 앉아 있을 게 뻔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조정을 했다고 치자. 달력의 벽을 넘어 이제는 더욱 현실적인 두꺼운 벽이 있다. 통장. 아니, 뭐 그래. 먹고 살기 힘들 만큼 가난한 프리랜서는 아니긴 하다. 바쁜 만큼 많이 벌진 못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고 저축도 하고 즐길 거리도 적당히 즐길 정도로는 벌고 있다. 그런데도 왜 통장이 벽인가?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인정이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해야만 한다.


인정이는 내 안의 인정 욕구를 가득 담아 만들어진 나의 또 다른 자아다. 나는 인정이 덕분에 프리랜서가 되고 먹고 살 걱정은 할지언정, 실제로 먹고 살지 못한 적은 없었다. 늘 일이 부족해지기 전에 인정이가 나를 다그쳤기 때문이다.


"너 지금 미리 일 안 구해두면 나중에 힘들어진다?"

"너 하고 싶은 거 있잖아. 지금 열심히 해야지?"

"말복아. 너 일 안 할 거야? 너 지금 그럴 때야?"


등등. 내 인정이는 다방면으로도 관심이 많지만, 특히나 일에 관심이 가장 많다. 일로서 인정받았을 때 가장 기뻐하고, 무언가 이루었을 때 가장 뿌듯해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이 어그러질 것 같을 때, 일이 없어질 것 같을 때, 일이 잘 안될 것 같을 때 가장 불안해한다. 일이 어그러지거나 없어지거나 잘 안되면 무척 우울해하기 때문에 미리 불안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갈 수 있을까?' 하며 무리해서 워케이션을 떠나보려다가도, 인정이가 한 마디 속삭이면 게임이 끝난다. '지금 네가 그럴 때야?'


그래, 사실은 달력이나 잔고의 문제는 아니다. 내 마음의 문제가 맞다. 나도 글을 쓰면서야 깨닫게 되어 머쓱할 따름이다.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프리랜서 버킷리스트 중 하나. 워케이션 다녀오기.


나도 밖에서 맘 편하게 일하는 날이 오길.



한참을 써내려가다가도 지우고, 또 쓰다가도 지웠던 이 글은

원래 워케이션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가득했었는데요.

계속 쓰고 지우며 결국은 내 마음의 문제라는 걸 깨닫고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래요. 사실은 다 핑계입니다.

어떻게든 가고자 하면 갈 수 있어요.

근데 마음 편히 못 다녀올 것 같아서 안 가고 있어요.

떠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죠. 두려워서.

내년엔 워케이션을 떠날 준비가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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