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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by 말복


"악!"


순간 발등에 찡한 통증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놀라 내려다보니 벌겋게 부어 있는 발등에 하얀 할퀸 자국이 보인다. 고양이는 놀란 듯 멀찍이 도망가 앉아 있다. 어느새 작게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심호흡하고 고양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내 속도 모르고 고롱대며 자리를 잡고 눕는 고양이의 발톱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제야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톱이 한참 자라 있었다.




요즘 자주 겪는 일이다. 평소에는 적어도 일이 주에 한 번씩은 발톱을 살핀다. 그런데 최근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잊혀 결국 이렇게 됐다. 발등의 상처가 따끔하다. 내 부주의는 고스란히 흉터로 남았다. 흉터야 약을 바르면 그만이지만, 그간 살펴주지 못한 고양이의 마음엔 어떤 약을 발라줄 수 있을까. 곁에 가 가만 끌어안고 누우니 내 속도 모르고 골골댄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고양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찡해온다. 그간 너무 소홀했다.


바쁘면 시간 여유가 없어서 주변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안 바쁘면 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주변을 못 보기도 한다. 프리랜서 3년 차를 앞두고 있는데 아직도 해결 못 한 문제 중 하나다. 요즘은 연말이 되며 바빠져 시간 여유가 없는 동시에 계약 종료를 앞둔 프로젝트들 때문에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웹툰 어시로 계약한 건들이 모두 완결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기한 없는 외주 피디 계약 건도 불안정하다. 피디를 담당하는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담당자들이 철야를 했고, 한국 담당자는 새해부터 해외 본사로 출장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먹고 사는 건 중요한 문제니까. 라고 평소처럼 되뇌며 더 열심히 일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것만 끝나면 여유가 생길 거야.'


착각이었다.


고양이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주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이제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하고 들뜬 마음으로 양치하고 나왔다. 그러다 멈칫했다. 어? 뭐였더라.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였지? 뭘 그렇게 좋아했더라? 일단 카페로 향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고, 그사이 들어온 업무 연락에 일만 하고 돌아왔다.




나는 돈을 벌어야 내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그 '내 것'이 뭔지도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화가 났다. 아니, 이건 아니잖아. 바쁘다는 핑계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걸 놓쳐왔던 거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다정함도, 고양이와의 시간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내 것에 대한 마음까지도. 다정함을 나눌 수 있는 때는 따로 있고, 내 꿈을 가꾸어나가는 때도 따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알지 못했다.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밀린 카톡과 메일과 신규 알람들이 쌓이고 있다. 친구가 보낸 카톡을 읽었는데 답장도 보내지 못했고, 동료 작가가 보낸 위로의 메시지들도 '나중에 답장해야지.' 혹은 '다음에 더 마음을 담아 먼저 연락해야지.' 하고는 잊혔다. 2~3일에 한 번씩은 엄마에게 전화하곤 했는데, 엄마와의 최근 통화 기록은 일주일 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까? 바쁘다는 핑계로 대체 얼마나 많은 따듯함들을 지나쳐왔던 걸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는데 왜 또 일로 기울어 있었던 걸까? 일이 중요한 건 맞지만, 일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들과 마음들을 놓친다면 그게 내가 바라는 걸까?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고 싶었는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모르겠지만, 생각한다고 답이 생기진 않으니까. 일단 오늘은 고양이가 있는 거실로 노트북을 들고 갔다. 카페에 가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간식과 차를 끓여 고양이와 일하기로 했다. 평소라면 일을 방해하는 고양이도 오늘은 가만히 무릎에 자리를 잡는다. 슬그머니 품에 파고들어 그르렁대다 나를 올려다본다. 가볍게 미간을 쓸어주고 나도 노트북 뚜껑을 연다. 약간 불편하고, 업무 효율은 조금 낮아졌지만 이렇게라도 조금이라도 소중한 존재들을 챙기고 싶다.


내 마음속의 온기가 지금은 미지근해진 것 같다. 얼마 전까지는 일 때문에 불타올랐던 것 같은데, 어차피 매일 일이 밀린다면 그냥 조금 더 밀리더라도 주변과 함께 하기로 한다. 이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싶을 만큼 소중한 존재들이 있다. 고양이, 엄마, 연인, 동료, 친구, 그리고 나. 바쁨에 휩쓸리는 동안 불씨가 꺼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주 작게 남아있던 불씨를 소중히 끌어안고 작은 장작들을 다시 찾기로 한다.


절대로 내 다정함과 일상과 꿈, 그리고 그 무엇도 돈과 일에 주도권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어제는 갑자기 울고 싶어져서,

그럼에도 역시 울고 싶어져서 울고 시원히 감정들을 보내주려 했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감동적인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냥 우는 걸 체념하고 영화를 멍하니 보다가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왔어요.

그리고는 손을 씻고 나와서 그냥 갑자기 멈춰서서 멍을 때렸어요.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멍 때리다가 그제야 갑자기 찔끔 눈물이 흘렀어요.


눈물을 흘리는 것도 감정을 느껴야 가능한 거잖아요.

아, 우는 것도 쉬어야 가능한거구나. 쉬어야 마음에 감정이 들어오니까,

그제야 눈물이 나더라고요.


번아웃은 아닌데.. 그냥 이런 .. 왈칵했다가 돌아왔다가 따듯해졌다가

참잠해졌다가, 마음이 좋았다가 가라앉다가를 반복하는..

약간.. 미적지근하지만 힘을 내보고 싶고, 그러다가도 쉬고 싶은..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흥.. 그래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 거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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