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이는 수용은 진정 나를 비우는 것
단단한 돌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자아 내지 에고라 한다.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자의식, 자존심, 나라고 말하는 정체성에 의한 고정관념 등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흐름을 방해하여 길을 바꾸게 한다면 그것은 그의 수용이지 나의 수용이 아닌 것이다.
단단한 장벽은 수용의 덕을 행할 수 없다.
과연 우리에게 단단하지 않은 상태는 어떤 상태이며 수용하는 자세는 어떤 자세인가.
댄스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나는 흐르는 물을 거스르는 돌인가를 생각했다.
최근 수술밖에는 답이 없다는 지간신경종의 결절이 커져서 침치료와 자가 치료로 통증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틀째 발가락과 발바닥에 강한 자극의 침을 꽂아 신경종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내가 옳은 건가.
'꼭 낫고 말 거야.' '빨리 나으마.' 강한 의지로 발가락과 발바닥을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댄스 할 때는 잘 버텨주고 돌아올 때면 아프다 아우성을 친다. 찌리릿 찌릿 지지직...
발가락이 날카로운 칼에 베어나가듯 아프다.
'난 빨리 낫게 하고 싶은데, 넌 왜 계속 더 아프다고 하니?'
'나를 괴롭히지 마. 위아래로 침을 꽂아대니 너무 아파.'
발가락이 끙끙 앓는 것 같다.
과연 내가 말 못 하는 신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치료한답시고 더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가.
몸이란 최소한의 치료를 해 주고 스스로 치유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몸을 살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일념의 고집으로 죽이고 있는 건지 고민하게 된다.
멍든 발등과 발바닥을 보니 측은했다. 발도 많이 아프구나 싶다.
특히 아픈 왼다리를 질질 끌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라보고 있는 나.
발은 예의주시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관문을 여니 안에서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에 젖어드니 심신이 안정된다. 통증에 반응하지 않으니 발가락 통증도 순해진다.
발가락이 내 신경에서 벗어난 듯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말하는 듯하다.
'그래. 지금처럼 나 신경 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걸어주라. 그러면 나도 편해져.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운동이 되고 내 기능을 찾을 수 있어.'
갑자기 한참 동안 마음을 닫았던 아들이 생각났다.
엄마인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 좀 하라고, 왜 그러냐며 다그치던 때 마음의 문을 더 닫아버렸다.
내 목소리가 크고 내 마음이 그 마음에 침범할 때 꼭꼭 숨으며 더 힘들어했었다.
다른 인격체도 아프고 힘들 때는 몰아붙이지 말고 지켜봐 줘야 할 때가 있다. 이 몸의 일부조차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임을 잊고 있었다.
자연은 자연스러울 때 제 모습과 기능을 찾는다.
누군가, 무언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흐르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수용의 자세가 아닐까.
흐르는 물에서는 결코 단단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며, 흐르는 바람 앞에서 단단한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곧 올바른 수용이지 않을까 싶다.
무한의 시공 속, 고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은 무한의 텅 빈 상태. 그를 관통해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것.
프랑스 선불교 승려인 캉쿄 타니에는 저서 '고요를 배우다'에서 시끄러운 도시에서 고요를 찾는 방법으로 많은 소음들이 자신을 관통하여 지나가도록 한다고 했다. 엄밀한 수용은 이런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고요해지는 것. 그것은 침묵으로 조용해지는 것이 아닌 텅 비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받은 것이 없는 것. 수용은 내면 속 무한의 시공간을 허용하는 것이다.
장자는 변화를 따르면 한결같음도 사라진다고 했다. 여기서의 한결같음은 정체성, 자아와 에고의 의식이다. 변화란 자연 순응을 말한다. 자연스러움을 따르면 자아마저 사라진다는 말이다.
몸과 마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보고 함께 흐르는 바람이라 보자.
인간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 것을...
이 세상에서 수용이란 그저 어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수용이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놓아버리는 것이다.
받아들이려면 먼저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질긴 아집과 관념 등 내게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 그 무엇을 채울 수 있고 받아들여 관통을 허락할 수 있다.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없으면 받아들여야 할 것도 없어진다. 이는 변화하는 자연에 그저 순응하는 것이다.
수용을 말하기에 나의 사유와 표현이 많이 부족하다.
쉽게 말하면, 그저 내 마음을 내려놓고 순응하는 것. 받아들임. 결국 무위의 행을 하는 것. 순리대로 신의 뜻에 따라 주어진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자세가 수용의 자세이다.
그렇군
그러려니
여시여시
머무름 없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발가락이 아프니 최소한의 치료를 하고 기다리는 것, 어긋난 자식 마음 들쑤셔 덧내지 않듯, 신체도 들쑤시지 말고 시간을 주는 것 또한 수용인 것을...
내 고집이 섞이면,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자연의 신체정렬을 따르고 재생력을 믿고 기다리는 것 또한 순응. 그도 수용이다.
수용의 또 다른 장면, 인간관계의 소통에서 한 귀로 듣고 흘려주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일 수도 있고 가장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내 생각을 툭 내려놓고 상대를 경청할 때 수용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은 해서 올라오는 것보다 그저 떠오르는 것이 더 많다. 모든 생각과 감정들이 수용의 장애가 된다. 그래서 어렵다.
손바닥 뒤집기가 쉬운가?
나는 어렵다.
진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것들은 손바닥의 양면 같이 밀접하고 쉬운 일인데 늘 생각과 감정이 방해하기 때문에 어렵다.
보이는 행이 다가 아니고 말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용은 가장 쉬운 일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참 수용을 아는 일이 선과제다.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 먼저이다.
바람을 잡지 말고 보내는 것처럼 감정과 마음, 생각 등에 신경을 두지 말고 받아들여 보내라.
수용은 나를 포기하고 더 큰 우주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다.
수용하면 참자유가 온다.
원래, 세상도 우리의 참모습도 심무가애 무가애고...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니 괴로움도 없기 때문이다.
저요?
가깝고 먼 곳.
눈앞에 있어도, 너무나 멀어 한발 한발 다가갑니다.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서요. 제가 할 수 일도 그뿐입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수용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