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잔에 담긴 우리네 삶
와인은 단순한 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와인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자연의 산물이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는 마치 우리네 인간의 삶과 같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환경에 영향을 받고, 삶을 통해 스스로를 가꾸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은 맛을 내는 존재가 된다.
와인의 떼루아와 우리 인생의 떼루아(Terroir), 결국 이 둘은 매개체만 다를 뿐이지 탄생에서부터 성장과 숙성, 그리고 완성을 이루어가는 총체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포도가 자라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포도밭의 위치, 토양과 기후, 일조량 등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와인의 맛과 품질을 결정짓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성격과 삶에 대한 철학이 형성되고 차츰차츰 성장해 나간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난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삶의 궤적을 달리하게 되지만, 결국 그로 인해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맛과 매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포도 품종의 선택은 와인의 성격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예를 들어, 카베르네 소비뇽은 강하고 풍부한 타닌을 자랑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부드러워지는 특성을 지닌다. 이것은 마치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삶의 경험을 통해 점차 부드러워지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한편, 리슬링 같은 포도는 청량하고 상큼한 맛을 내며, 더운 여름날 마시기에 적합하다. 이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삶을 상징할 수 있겠다. 와인에서의 이러한 선택과 특성은,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선택의 과정과도 연결된다.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은 또 어떠한가. 이 과정은 굉장한 섬세함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와인 메이커는 수확된 포도를 압착하고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때로는 포도가 가진 잠재력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기다림을 선택한다. 이 기다림은 우리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서두르지 말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내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간다. 와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복합적인 풍미를 얻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경험을 통해 더욱 깊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와인의 양조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어떤 와인은 오크통에서 숙성되며, 그 과정에서 오크 나무가 가진 향을 흡수하여 더욱 복합적인 맛과 향을 만들어 낸다. 이는 우리가 인생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욱 풍부한 삶의 통찰을 만들어 가는 것을 연상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양조되는 와인은 포도 본연의 맛을 강조하며,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이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스파클링 와인, 예를 들어 샴페인의 경우를 보자. 샴페인은 이차 발효를 통해 만들어지며, 그 안에 담긴 거품은 끊임없이 위로 솟구쳐 오르는 삶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샴페인의 탄산이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의 소중함과 활력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샴페인은 그 거품 속에 우리의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샴페인을 따는 것이 아니겠는가.
명성의 차이와 스타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와이너리들은 대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수많은 와이너리들이 각자 그들만의 철학을 가지고 와인을 양조한다. 전통적인 방식에 충실한 와이너리도 있고,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해 새로운 맛을 추구하는 와이너리도 있다. 이 또한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 철학은 때로는 전통을 존중하고 지키는 방향일 수도, 혹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이탈리아의 안티노리(Antinori) 가문은 26대에 걸쳐 700년 가까이 와인을 양조해 온 전통을 가진 최고의 와이너리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가문의 전통을 지켜오면서도,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지속적으로 와인의 품질을 높여왔다. 이러한 철학은 마치 인생 속에서 우리가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과 같다. 우리가 속한 문화나 가족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현대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를 혁신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과제임을 알려준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와인에 열정을 쏟아온 위대한 가문, 안티노리 와이너리는 오늘날 프레스코발디(Frescobaldi), 가야(Gaja)와 함께 이탈리아의 3대 와인 명문으로 그 명성이 높다.
안티노리 가문은 1180년부터 피렌체 교외 지역의 토지를 매입해 포도나무를 심어 양조를 했고 1202년 전쟁으로 인해 피렌체로 이주했으며, 당시 상업도시였던 피렌체에서 비단직공조합에 가입하며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293년 피렌체의 와인 생산자들이 모여 와인생산조합을 결성했는데, 안티노리는 1385년 이 조합에 가입하면서 공식적으로 와인생산 가문이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1385년에 세워진 이탈리아 안티노리 와이너리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양조장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음).
16세기 초에 선조들이 남긴 안티노리 와이너리의 3P 경영철학(열정 Passion, 인내 Patience, 끈기 Perseverance)은 현재 가문을 이어받은 26대손 큰딸 알비에라 안티노리도 변함없이 지키고 있으며 ‘품질 제일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탈리아 와인이 전 세계적으로 품질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원산지 명칭 보호에 관한 법규가 제정되면서부터이지만, 안티노리 와이너리는 법규가 허용한 품종과 양조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혁신과 도전을 시도해 티냐넬로(Tignanello) 와인을 양조했는데, 이는 수퍼 투스칸(Super Tuscan)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1978년 티냐넬로 포도원에서 가장 좋은 포도밭을 선별해 양조한 것이 이탈리아 3대 와인 중 하나인 솔라이아(Solaia: 태양을 담은 와인) 와인으로 세계적인 와인 잡지 ‘디켄터’와 ‘와인 스팩테이터’에서 100대 와인 중 1위로 선정되어 그 품질을 인정받은 바 있다.
와인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가치를 더해간다. 젊은 와인은 때로는 직선적이고, 그 맛이 뚜렷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복합적이고 깊이 있는 맛을 형성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삶 속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성숙해지며,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쏙 닮아 있다. 이처럼 와인은 여러 면에서 우리네 인생 그 자체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와인과 우리의 삶 모두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인내가 필요하며, 그로 인한 다양한 경험의 끝에서 얻어지는 것은 더 깊고 풍부한 맛과 향, 그리고 인생의 지혜이다.
한잔 한잔 마시면서 와인의 깊이를 음미하듯이, 우리 인생도 천천히 음미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고 있고, 여기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강박과 불안은 단순히 우리를 지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우리를 인생의 조타실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때때로 서두르지 말고 두 손으로 ‘타륜’을 꼭 잡은 채, 매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음미하며 인생의 항로를 헤쳐나가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와인처럼,
그냥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아름답게 익어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