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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Oct 27. 2024

집으로 돌아가다


겨울은 깊어져  어느새 늦겨울, 다음 해 2월이 됐다.

학교에선 신입생 OT가 있었고, 난 잠시 갑갑한 현실도 잊을 겸, 대학생활의 냄새도 미리 맡아볼 겸 2박 3일의 OT를 다녀왔다. 아마 동해안 낙산쯤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젊은이들이 잔뜩 모인 자리인지라 그런지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고, 잠시 간의 해방감에 나름 만족스러운 힐링 여행이었으나, 고등학교에서 공부만 하다 입학한 동기들이나, 몇 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선배들은 가게에서 사회물이 잔뜩 든 직장인이나 장사하는 분들, 목에 힘주고 드나드는 제법 부유하거나 한 자리하고 있던 손님들, 매일 수금하러 다니는 험악한 인상의 일수 아저씨, 이런저런 경험에 강단이 든 노련한 아가씨들을 잔뜩 보아왔던 나에게는 너무 어리게만 느껴졌고, 선배들이 진행하는 행사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마땅한 대화거리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동기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내 말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고, 별 말없이 이야기를 들으며 간간이 담배를 피우면서 술만 마시고 있는 나를 어떤 이들은 좀 이상한 아이인가 보다 하는 눈빛으로 보다가 이내 외면했고, 어떤 선배들은 이런 내가 시건방져 보여 맘에 안 드는지 티꺼운 눈길로 간혹 쳐다보곤 하는 걸 느꼈다. 또 어떤 이들은 말수 없는 내가 조금 궁금하고 호기심이 들기도 하는 듯했다.


2박 3일의 오리엔테이션 워크샵은 그렇게 지나갔고, 마지막 날 밤에 선배가 우편엽서를 한 장씩 돌리면서 지금 동해안 바닷가애서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제출하란다. 부모님도 좋고 가족이나 중, 고등학교 때의 친구나 친척, 혹은 애인.. 아무나 자기가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에게 쓰면 된다고 했다.  제출받아 취합하면 이곳을 떠나는 다음날 아침에 이곳 동해의 우체국에서 일괄 발송을 해주겠다고 말이다.  뭐랄까, 센치한 감성으로 말랑말랑한 이벤트를 기획한 듯한 모습에 난 실소가 나왔다.  내가 엽서를 누구에게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수취인 불명의 엽서를 쓰고 주소도 대충 적어 냈거나, 혹은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던 죄송한 마음을 담아 부모님에게 썼음 직도 하겠다.

 

그렇게.. OT를 다녀오고 난 다시 아주 어정쩡한 상태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경희와 같이 일하던, 나와는 동갑인 민아란 친구가 있었다. 처음 카페에 취직했을 때 나에게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친구다. 그 친구가 페퍼민트 칵테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때 화들딱 놀라고 다시는 아무 데서도 페퍼민트 칵테일을 주문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페퍼민트 칵테일은 지금의 슬러시 음료처럼 잘게 간 얼음이 들어가는데, 그걸 따로 가는 기계가 있거나 연장을 써서 깨뜨리는 게 아니라, 편의점에서 산 얼음을 비닐봉지를 뜯지 않은 채로 여러 차례 반복해 바닥에 던지면서 얼음을 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저런 여러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친구 사이로 지내는 민아는 가출하게 된 집안 문제와 경희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늘 위로해 주고 때때로 격려를 해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툭하면 “야, 우리 중에 제일 고학력인 너~ 그렇다고 우리 앞에서 건방 떨진 마라~” 하면서도 우스개 소리로 곧잘 나를 웃겨줬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어 단어라던가, 혹은 본인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선 나에게 질문을 했고, 이내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해주면 와- 하면서 신기하다는 듯 대단하다는 듯 제스처를 지어 보이곤 했다.


그런 민아가 언제부터 날 남자로 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걸 느꼈을 때에는 나 역시 그런 그녀가 어느새 내 가슴속에 여사친이 아닌 여인으로 살짝 다가와 있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이제 선택은 두 개였다.


미안하고 아쉅지만 경희가 친하게 지내던 언니와 사귈 수는 없는 노릇, 권태로워졌지만 여전히 공식적인 내 사랑이던 경희와의 의리를 지키던가, 이젠 감정에 솔직해져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경희와 어떻게든 잘 정리를 하고 민아를 받아들이던가.


아니, 생각해 보니 세 개였다.


민아를 택하면 뭐, 결혼까지 할 건가? 아직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할머니와 부모님 모두의 속을 썩이고 있고 학업도 제대로 못하고 망가져버린 신세 아닌가.  민아 역시 내가 대학을 다니고 싶은 맘이 있는 것을 알았고, 입학 등록금 납부기한도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계속 다닌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결국 자신들과의 이별이 되는 과정이 되리란 걸 서로 잘 느끼고 있었기에 난 대학 문제도 서둘러 마음을 정해야 했다.


여러 가지 고민으로 번민하던 나의 보안수칙이 무뎌졌던 것인지,  그 와중에 난 결국 그동안 계속 날 찾아 나섰던 형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그리고.. 날 붙잡아 자리에 앉히고 단 둘이 얘기를 시작하는 형의 손에는 내 앞으로 날아온 입영통지서가 들려 있었다.


형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도망쳐서 여기서의 생활을 이어간다면 어차피 난 곧 군에 입대해야 하는 신세였다.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만약 군 입대를 늦추고 싶으면 대학교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물론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도 가지고 하면.. 연기 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이었고, 생각했더라도 절대 선택하진 않았을 방법이었다.


결정하지 못하고 번민만 하던 난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군 입대를 미루게 되었다.


집으로 들어간 날, 아버지는 내 목례 인사를 받은 뒤 아무런 말씀 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셨고, 그날 어머니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날 붙잡고 눈물만 흘리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용돈과 이것저것 보내던 사람이 당신의 막내 손자였음을 알고 계셨더랬다. 아마 언젠가 편의점 사장님이 언질을 주었나 보다.  난 말없이 무릎을 꿇고 마음으로 사죄를 드렸다. 순간의 분노에 집을 뛰쳐나갔고 시간이 길어지며 내 인생행로가 생각지도 않게 비틀어져 버린 스스로에 대한 회한도 어느 정도 함께 있었다.




대학 생활의 시작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과 갈등을 안겨 주었다. 대학에 첫 발을 내딛는 날, 마음을 가다듬으며 강의실에 들어섰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환경과 부딪히며 나는 마치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친구를 사귀고 동아리에 가입하며, 강의 시간마다 열정을 다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서서히 몰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희와의 관계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대학 친구들과 어울려 캠퍼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밤이 되면 결국 경희의 걱정과 그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경희의 연락을 받았다.  공중전화 수화기에서 들리는 그녀의 음성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오빠 요즘 잘 지내? 대학 생활 재미있지?”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응, 괜찮아. 새로운 것도 많이 배우고, 좋은 사람들도 많아.” “그래, 다행이네. 근데 난... 오빠가 필요해.”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경희의 필요와 나의 자아를 추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다시 예전처럼 그녀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 그녀의 불안과 의존에 계속해서 얽매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를 그렇게 혼자 두는 것도 두려웠다.


어느 날 밤, 난 캠퍼스의 작은 공원에서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경희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경희는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오빠,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그녀가 물었다. 나는 깊이 숨을 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경희야, 우리 이제 달라져야 해. 너도 나도 서로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어.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순 없어.” 그녀는 놀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난 네가 필요해... 넌 내 전부야. 학교 잘 다녀, 뭐라고 안 할게. 내가 괜히 연락했나 보다. 대학은 방학도 길지? 여름, 겨울 방학 때 같이 지내면 되잖아. 몇 년 후면 졸업도 할 테고..”  


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널 생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널 지켜주고 싶지만, 우리 둘 다 이 상태로는 계속 살아갈 수 없어. 나도 나 자신을 찾고 싶고, 너도 네 삶을 찾아야 해. 널 확실히 책임질 수 없는 나를 믿고 무작정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어”  경희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둘 다 무거운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경희 집에서 자지 않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그렇게 얘기하고 나왔다고 경희와의 사이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난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내 할 얘기를 하고 침묵의 시간을 견디다 집을 나왔고, 그녀가 이후 연락을 하면 매정하게 무시하고 모른 척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돌려 말하지 않고 내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한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난 대학 생활에 몰두했다.


캠퍼스에 조금씩 적응해 가면서도 민아와의 관계는 아직 아무렇게도 결론이 나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얘기한 뒤로 경희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만, 어쩔 줄 모르는 내 마음은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었다. 캠퍼스는 너무 넓었고, 그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게만 느껴졌다.


어느 날, 민아가 학교로 찾아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 경희랑 헤어진 거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더 이상 우리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지내면 안 될 것 같아."  

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민아에게도, 경희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내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민아야. 나도 모르겠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어." 자신도 답답하지만 그래도 민아는 그런 나를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마음이 나에게 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일단 오늘은 돌아갈게. 경희가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이번엔 너와 정말로 헤어진 것 같아서 너에게 직접 들으러 왔을 뿐이야. 네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면 더 좋았겠지만, 너도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왔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어지럽겠지.”


“…”


“나도 일단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돈을 벌어야 해. 넌 이제 집으로 들어갔고, 대학도 들어갔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너도 나도 모를 일이지. 일단 학교 다니면서 차분하게 생각해 봐.  그렇지만..”


“그렇지만.. 모?”


내 물음에 민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얘기했다.

“네 진로와 미래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란 거야. 학교 다니면서 대학생 기집애들한테 눈 돌아가서 시시덕거리고 그러면 죽을 줄 알아! 내 성격 알지? 내가 학교에 끄나풀들 다 심어 놓을 거야. 나도 대학교 다니는 친구들 몇 명 있다고.”


이 말을 뒤로하고 민아는 총총걸음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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