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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Nov 17. 2024

불확정성의 원리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일은 꽃처럼 빛나는 시기에 기다려주지 못할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고, 남자에게 있어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아무런 능력 없이 초라할 때 평생을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만난 것이 아닐까..


수렵채집을 하던 먼 옛날까지 가지 않더라도 농업생산의 혁신과 상하수도 시스템의 발명, 그리고 항생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인류의 평균 수명은 대체로 30~40살 정도면 끝이었다.  그러니 그 오랜 기간 인류의 삶에서 20대는 딱 중간 정도의 어른스러운 나이였을 것이다. 지금은 위생의 개선과 의학 및 의료시스템의 발전으로 수명이 길어져 소위 100세 시대라 일컬어지고 있으니..


신체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기가 변화된 수명에 맞춰 기존의 20대에서 30~40대쯤 더 뒤로 옮겨지기에는 아직 진화의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의 가장 좋았던 시절이 고작 길고 긴 인생의 20~30% 밖에 안 살았을 때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니.. 그리 생각하면 벌써부터 뭔가 억울하고 서글퍼진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나이에 자신도 끌리고 관심이 가는 남자는, 대체로 자기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정도 연배의 남자일 것이고, 금수저가 아닌 다음에야 그 나이대의 일반적인 남자들은 아직 사회적 지위가 낮고 소득 또한 불분명하거나 적을 때가 많겠지.

결국 뜨겁게 사랑을 하다 그 사람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면서 이 사람이다 싶어 먼 미래를 계획하려다 보면, 뭔지 아쉬운 게 하나 둘 생기고 콩깍지가 씌었던 눈이 트이며 주위를 둘러보면서 친구들과 비교해 보게 되겠지. 마음은 아직 이 사람을 사랑하지만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고민하다 가슴 아프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떠나가게 되는 것일까.


남자라면 여인을 만나 사랑을 시작하고 그 마음이 권태와 실망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점점 더 그 여인을 지켜주고 잘해주고 싶고, 결국 책임을 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마음이 되면 평생을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옆에 있는데, 막상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능력은 부족해 보이기만 하고, 주변의 더 잘 나가는 수컷들이 잔뜩 눈에 들어오겠지.


마음 같아서는 생일날이나 기념일날,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그런 멋진 선물과 이벤트를 해주고 싶지만, 현실은 몇만 원짜리 꽃다발과 14K, 18K 금반지 정도의 선물을 해주고, 학교 앞 늘 가던 카페에서 그나마 거기서 제일 비싼 안주를 시켜 소주나 한잔하고 있다면..  

설령 상대방이 아무런 불평 없이 마냥 좋아해 준다 해도 언젠가부터 나 스스로  한없이 초라해질 것이다..  내 마음이 스스로.


결국 미래를 그려보고 집안에선 부모님이 결혼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렇게 여자는 떠나가게 되는 것일까.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남자는 뜨거운 혹은 구질구질한 안녕을 고하거나, 애써 쿨한 척 담담하게 보내줄 수도 있겠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펑펑 울며 소주를 털어 넣고 한없이 찌질한 모습을 연출하겠지.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를 그려본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서운한 마음에 상심하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니 더 우울해진다.  뭐랄까, 허무함과 깊은 상실감.. 무력감 같은 것들이 마음속 가득 차오른다.  나란 놈이 점점 더 쓸모없는 놈처럼만 여겨진다.  


그날 그렇게 집 앞 놀이터에서 헤어지고 나서 며칠 내에 다시 연락하고 대화를 하면서 어정쩡한 이 뭔가를 풀고 화해를 시도했어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회로 복귀한 나는 가슴 한구석이 계속 답답하고 아려왔지만, 나름 군복을 벗은 일상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고 운전면허도 취득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여러 번 만난 친구들과 선배들과의 반가운 술자리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조합해 완성된 퍼즐은, 적어도 그들이 아는 범위에서는 기은이가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다른 남자 사람과 친하게 지내거나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형식 선배가 말하길 다른 후배 녀석 군대 가는 길이라 환송회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2차로 간 노래방에서 평소 노래를 안 부르던 기은이가 노래를 부르는데, 이장우의 ‘훈련소로 가는 길’을 그렇게나 애달프게 부르더라고.. 그때 다들 기은이가 너 생각하면서 부르나 보다, 너가 없어서 많이 힘든가 보다.. 하면서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야 말았다.


* 훈련소로 가는 길 : https://youtu.be/O-WJXtcq-Zg?si=VZFFqE66VQGFiWTb


그랬던 아이가 대체 왜..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를 듣긴 했지만, 난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미래에 아무리 불확실성이 많더라도, 우리 나이 때의 청춘들의 사정이 별반 그렇게 다르던가!  그 앞길에 부정적인 예측이 많이 될지라도, 그렇다고 미리 밀쳐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다시 예전처럼 지내면서, 다가오는 일들은 함께 헤쳐 나가길 바랬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거대한 것이 – 가령 집안의 반대 같은, 그런 문제로 결국에 우리가 끝까지 맺어지지 못한다면 그건 그때 가서 감내할 문제였다.

상처가 커질까 봐 미리 잘라낸다?  사랑해서 헤어진다?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였다. 그래서 나의 이성은 그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기은이의 변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함이었다.


차라리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못 기다리고 다른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면 오히려 이렇게 찜찜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것은 아니라니 막 뭐라고 화를 내거나 추궁을 하기에는 명분이 없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내기에는 뭔가 애매하게, 왠지 모르게 변해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 그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짓눌렀다. 화도 못 내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우리의 만남은 끊어진 채 시간만 흘러갔고, 혼자 있을 때면 서운하고 서글픈 느낌에 혼자서 온갖 불운한 상상의 나래만 펼쳤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채로, 그렇게 서운함과 오해가 쌓인 채로 여름이 흘러갔다.  우리는 아무것도 풀지 못한 채 2학기를 맞았고 난 복학을 했다.   


제대하고 복학한 첫 학기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캠퍼스는 변해 있었고, 친구들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한 번은 수업이 끝난 뒤 술자리를 하고 2차를 가기 전에 잠깐 ‘한게임’ 하고 가자는 말에 당연히 당구장으로 앞장서 발걸음을 옮기던 난 뒤에서 ‘형, 어디가?’ 하고 불러 세우는 후배들의 외침에 머쓱해졌더랬다. 알고 보니 애들이 얘기한 한게임은 당구가 아니라 스타크래프트란 게임을 하러 게임방에 가자고 한 것이었던 것.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가장 큰 변화는 기은이와의 관계였다.  


이젠 학년이 달라져서 듣는 수업들도 차이가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학교에 가도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마주친다 해도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만 나누고 지나치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선배들이 나와 기은이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너네 헤어진 거냐고 묻는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모습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마음이 불편한 나는 서운함과 짜증이 섞인 그런 생각에 서서히 그녀를 보아도 못 본 척 지나갔고, 마치 투명인간처럼 그렇게 대했다.

그러면서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기은이를 영원히 못 보거나, 공식적으로 헤어지게 될까 봐 크게 걱정하진 않았던 것은 우리가 여전히 학교에 남아있고,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연락하고 볼 수 있는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난 우연히 저 멀리 수업을 마치고 나온 듯한 기은이가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햇살 아래서 웃고 있었고, 그 햇살 아래 비친 그녀의 모습은 내가 군대에서 상상하고 그리던 모습과는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다르게 느껴졌다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뭐랄까, 그녀는 한층 더 성숙해지고 자유로워 보였다.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내가 군대 가기 이전의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리움과 미련이 혼재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전에 우리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인도의 경험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뿐만 아니라, 나 또한 군대에서 거친 시간을 보내며 변해버린 것은 없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지점이었다.  

내 마음이 지금 기은에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거꾸로 기은이가 나에게 서운하고 힘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기은이는 그런 얘기나 표현은 잘하지 않았다.  난 그런 게 있는지, 어떤 부분이 나로 인해 힘들었거나 나에게 서운한 점이 있었는지 한 번도 물어보거나, 눈치 있게 알아채 보려고도 안 했던 것 같다.       


난 기은에게 연락해서 그날 놀이터에서 그렇게 애매하게 헤어진 뒤로 처음으로 다시 단 둘이 만났다.    


"기은아!"


"왜 그러는 거니?  나보고 이상하다고, 못 알아듣는다고만 하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주렴.  우리가  예전 같지 않은 건 맞잖아.  

너,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잖니.  사소한 말투, 눈빛 하나하나.. 아니라고 하지 말아.  우리 서로 느끼고 있잖아.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에도 넌 그러지 않았었어.  편지가 쌓일수록 처음의 애달프고 절절한 마음 표현보다는 서서히 일상의 얘기들이 많아졌지만, 오빠에 대한 마음은 그대로였어.  인도여행을 나 빼놓고 혼자 가서 미안하다고 울먹이는 소리를 사서함에 남긴 게 언젠데, 그 뒤로 나 제대하는 날까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내가 잘못한 게 있거나, 나한테 서운한 게 있으면 속시원히 말해주렴. 내가 고칠게."


잠시동안 원망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기은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말투에는 살짝 짜증이 묻어 있었다.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나는 뭐 하나도 안 힘든 줄 알아?"

"나도 많이 힘들어. 너무 힘들었어."


그리고는 수업이 있다며 더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뒤돌아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먼저 가버리는 것도 처음이어서였을까.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젠 오빠란 호칭은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었다.  

자기도 힘들다는 말에 조금은 위로가 될 듯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역시 피치 못할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나에 대한 마음까지 변한 건 아닐 거야.  그게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힘들어'는 현재형인데, '힘들었어'는 과거형이잖아... 시제를 왜 섞어서 말한 걸까.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 디테일에까지 집착을 하게 되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답답하다.


나한테 엽서를 보내고 그렇게 자꾸만 먼저 다가왔던 녀석이.. 사랑이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변하니.

내가 군대를 더 늦게 갈걸 그랬나..  빨리 다녀와서 다시 기은이랑 만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던 당시의 내 판단에 온갖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인도의 모습, 그  이미지.  인도의 그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면서도 사회가 전복되거나 하지는 않고 카르마(업보)와 윤회를 믿으며 현생을 인정하고 유유히 살아가는 사람들...  

한쪽에선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리고, 다른 한편에선 그런 강물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사람들,  오염된 하수가 흘러들고, 다른 쪽에서는 물을 마시는.. 인도인들에게 성스러운 갠지스 강..

아직 어린 나이에 그런 인도의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거나, 느낀 바가  많았던 것일까.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허무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수많은 감정과 긴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매몰되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살지는 않겠다는 뭐  그런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괜스레 인도가 밉고, 기은이에게 인도여행을 가자고 꼬신 선배 누나들이 미워졌다.  


나로선 속 시원하게 입을 열지 않는 기은의 변한 모습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결국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나였다.  


.

.



Dear 오빠야.

오빠 편지 어제 잘 받았어요. 힘드신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잘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어제 형식 선배 생일이었어요. 정말 엄청나게 먹었는데 그래도 허전한 건 오빠가 여기 있었다면 당연히 내 옆에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간담회 시간이에요. 왜 딴짓하냐고요? 저는 어제 황교수를 만나 뵈었고 제 생각도 정리가 되었거든요. 오빠가 있었다면 오빤 아마도 수업을 들어보자 또는 기타 집행부 의견과는 다른 의견 쪽으로 생각했겠죠. -> 단순한 내 추측이에요. 그런데 전 원래 타당한 거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이건 타당하지 못하고요. 그래서 전 반대 입장이에요. 사실 이렇게 편 가르기 놀이하는 것도 지쳤어요.

오늘 아침 학교 오는데 벚꽃이 눈 내리 듯 떨어지는 거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예쁘게 피어있기만 했는데. 이제 정말로 봄이 왔나 봐요. 오빠 있는 곳은 더 남쪽이니까 더 예쁜 봄이겠죠. 퇴소식 날 너무너무 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아요. 자대 배치받으면 꼭 꼭 면회 갈게요. 오빠 빨래도 내가 해주고 싶은데 마음만 아플 뿐이에요. 군대에 세탁기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오빠 굴리거나 하는 人 있으면 이름 적어서 나한테 넘겨요. 다 처리해 버릴 테니까 -> 내가 인간 클리너 아니겠어요?  잔인한 4월에 너무나 외로울 것만 같은 그곳에 있지만 그래도 오빤 뭐든 잘 해내니까 굴하지 않고 잘 살고 있어야만 해요. 동봉하는 신문은 좀 시기가 늦었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일찍 보내고 싶었는데 순서가 계속 바뀌고 오빠한테 편지 쓰느라 정신없어서 편집이 늦어졌어요. 사실은 예쁘게 봉투도 만들었었는데 규격봉투 아니면 안 될까 봐 누런 서류 봉투에 보내는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잉. 자세한 얘기들은 편지에 써서 보낼게요.

자대 배치받고 주소 알게 되면 꼭! 꼭! 알려줘요.  물론 그전에 또 편지 보낼게요.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야만 해요.

안뇽.  

95. 4. 18 화요일.
- 살벌한 간담회장에서 보고 싶은 오빠에게 기은이가 적었어요.  with ♡


Ps. 혹시 수연 선배가 신문 보내드렸나요? 못 물어봐서. 어쩌면 2개 받겠네요. 우아~~ 인기 좋다.



Dear 오빠야..

안뇽? 저번에 약속한 대로 예전에 써두었던 편지. 차곡차곡 보내고 있는데 순서대로 볼지 모르겠네요. 어제는 현충일이었는데. 오빠는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네요. 군인들은 공휴일날 뭐 하나요? 똑같이 생활하나요? 난 어제 내내 집 안에 박혀 있었답니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에요. 아 그리고 요새 형식 선배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물론 장난인 거 서로 알지만 그래도 전화하거나 술자리에서 보거나 해도 서로 살벌하게 지내요. 그 이유야 간단하죠. 형식 선배가 자꾸 배 아프게 만들거든요. 지은 선배랑 잘 지내니까 정말 부럽기도 하고 보기 좋기도 하지만 너무 배 아프거든요. 어제도 전화해서는 마구마구 놀리면서 왜 집에 있냐는 둥 기타 등등으로 사람 열받게 하는 거예요. 게다가 학교도 오늘 안 나오고 이번주면 다 종강이래요.

왜 난 아무리 학년이 올라가도 빨리 종강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다다음주까지 수업을 한다는 거예요. 물론 시험은 한 번도 안 봤거든요. Report로 대체했는데 그것은 엉망으로 써서 냈고 출석도 물론 황이고. 에고에고. 내가 학기 초에 무슨 정신으로 장학금 타령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빨리 방학 오면 돈이나 열심히 벌어야겠다는 결심뿐이에요.

오빠야.. 요새 날씨 덥죠? 훈련받으면 땀 엄청날 텐데 선풍기나 에어컨도 없을 테고. 어쩌나요.. 병나면 안 돼요. 이제 여름날씨예요. 멋지게 썬텐을 하겠군요. 오빠는 선텐 하면 너무 sexy 해질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자제하시고 일부러 태우지는 말아요. 오빠의 sexy한 모습을 언제쯤이나 볼 수 있을는지..

1995. 6. 7 수요일
- 수업 들어가기 너무 싫은 날 낮에 공부방에서 기은이가 적었어요. with ♡



Dear 오빠야..

방금 전화 끊고 수업 들어왔어. 서교수님은 강의는 재밌는 거 같은데 잘 듣게 되질 않아.

오빠 기분이 별로인 거 같아서 걱정이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루. 목소리도 힘이 없는 거 같고. 그동안 너무 일을 무리하게 해서 진이 다 빠졌나 봐. 그지? 힘 좀 내라. 그렇다고 내가 오빠 재밌게 해 줄 능력 없는 거 알잖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어. C.C가 늘었어. 한 커플은 우리 동기들이야. 난 진짜 진짜 몰랐거든. 근데 어느새.. 물론 결국 들키긴 했지만 매우 놀라웠어. 근데 현숙 언니는 학기 초부터 눈치채고 있었대. 왜 몰랐을까. 누군지 궁금하지? 바로 동석이랑 혜연이야. 너무 귀엽지. 둘이 너무 닮은 거 같아. 특히 둘 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있을 땐 정말 너무 이쁜 거 있지. 그리고 또 한 커플은 새내기 성호랑 오빠랑도 친한 수정 선배야. 연상연하 커플. 물론 둘 다 극구부인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어. 근데 조금 안타까운 건 성호가 좀 더 좋아하는 거 같다는 거야. 수정 선배가 워낙 티 내지 않는 성격이긴 하지만.. 남자들은 연상의 여인에게 끌리는 그런 게 있나 봐? 그냥 그렇다고요.

요새 시험기간인데 시험 보는 과목은 3개뿐이 없는데 나머지는 다 Report에요. 다음 주까지 적어도 8개의 Report를 써야 해. 이번 학기엔 정말 숙제 복이 터진 것 같아.  …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끄적대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어색해. 요샌 편지를 안 쓰거든. 나 혼자 내 얘기 떠드는 게 싫어서. 근데 또 나 혼자 떠들었네.

오빠 얼굴 본 지 한 달도 넘었네. 어쩐지 보고 싶더라. 쫌만 더 있으면 까먹을 거 같아. 잊어먹기 전에 면회 가야 할 텐데. 요새는 중간고사 땜에 정신없거든. 중간고사 끝나고 학회장 선거 끝나면 갈게. 그게 언젠지는 모르겠다. 11월 초? 잘하면 10월 말? 그전에 먹고 싶은 거라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알았지? 건강하고. 요새 꽤 춥던데 감기 걸리지 말고. 꿋꿋이 잘 살기 바라.

내년 2월에 휴가 나온다고? 얼마 안 남았네. 신난다. 오빠 칭찬받았다고 그랬잖아. 혹시 상으로 휴가 안 줘? 말로만 하고 끝이야? 에잇. 쩨쩨하다. 아무튼 잘 지내고 있어. 안뇽~

오빠랑 Tel 하고 너무너무 Hapy 해서 약간 Crazy 한 기은이가 적었어요.  
오빠 목소리만 들어도 열광하는 Fan이잖아요.

with ♡    95. 10. 16


Ps 1. 이번주 금.토요일날 우리 학번만 MT가요. 모두 몽땅 가기로 했어요. 아 모두가 아니네.
오빠가 없으니까..
Ps 2. 아영이랑 이대 앞에서 만든 스티커 사진 보내요. 오빠도 휴가 나오면 같이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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