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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크슈타인 Nov 21. 2024

스칼렛, 선홍(鮮紅)의 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난 잠시 놀랐다.


상호는 그대로였는데, 내부는 인테리어를 완전히 새로 한 것 같았다. 훨씬 더 프라이빗하고 고급진 느낌이랄까. 이 정도면 일반손님 아무나 출입하는 곳이 아닌 멤버십으로만 운영하는 곳이라 해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것 같았다.


"안녕..!"


짧은 인사였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민아나 나나 우리가 알고 지낸 과거의 세월이 풋풋하고 아련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안 좋은 기억이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서일까. 마냥 편하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순 없었다.


시간은 오후 2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민아는 나의 전역을 축하해 준다며, 한번 가게로 오라고 했다.

입대하기 전에 한번 찾아왔을 때, 다른 손님이 와서 불편했던 기억이 남아서였는지 좀 이른 오후에 오라고 했고,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심전심이랄까, 나도 그게 낫겠다 싶었다.  


"드디어 제대했구나. 축하해~!!"

"사회에 복귀한 기분이 어때?"


민아는 잠시 날 쳐다보는 듯하더니 이내 호들갑스럽게 환히 웃으며 반갑게 맞아준다.


"뭐 그렇지 뭘.."  아직은 여전히 짧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 쑥스럽게 답했다. 민아는 날 한쪽 룸으로 안내했고 난 들어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으잉?"        


들어올 땐 몰랐는데 소파에 앉아 정면으로 보이는 반대편 벽을 보니 '<환> 재용의 전역을 축하합니다 <영>'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그 좌우 옆으로는 별모양 하트모양의 풍선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곧이어 민아가 위스키 세트를 들고 들어왔고, 뒤이어 조그만 케익과 안주들을 담은 큰 쟁반을 들고 어려 보이는 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난 순간적으로 대강 상황이 짐작됐지만, 어쨌든 모르는 낯선 이가 들어옴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민아야, 뭘 이렇게까지.."   


"가게 봤지?"

"군대 가기 전에 왔을 때랑은 딴판이지?" "하하, 내가 장사 수완이 있나 봐."


"그러게.. 정말 대단하다. 전혀 다른 가게 같아. 돈 엄청 벌었나 본데?"

"근데 이분은..."


종업원인 듯 하지만, 난 2년 만에 만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같이 있는 게 싫었다.

내 눈치가 빤히 보였는지, 민아가 선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얘 우리 가게 에이스야. 날 먹.여.살.리.는. 아이~ 나랑 나이 차이는 두 살 밖에 안 나지만, 훨씬 더 어려 보이지? 이름은 채아, 윤채아."

"이 분은 나랑 많은 사연이 있는 분이야 채아야, 아주 왠수가 따로 없지 ㅎㅎ, 가서 옆에 앉으렴"


두리뭉실 애매한 내 소개까지 마치더니 옆자리에 앉힌다. 그리고는 민아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서야 자세히 들여다본 민아의 모습은 그 아름다움이 한층 더 물이 올라 있었다. 과하지 않은 화장에 걸치고 있는 옷은 품격 있어 보이는 게 난 의류 브랜드 같은 건 하나도 모르지만 꽤나 비싼 옷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멀뚱멀뚱 있어 보였는지 민아는 이내 조크를 날린다.

"긴장하지 마 재용아, 아주 어린 친구가 옆에 앉으니 바보가 돼버렸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니?"


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하하 웃으며 민아가 이어 말했다.

"굳이 채아를 소개해주는 건 둘이 친하게 지내라는 건 아냐. 너 돈 좀 있는 선배들이 술 산다고 할 때 데려오라고. 너도 이제 제대했으면 친구 영업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또 몇 년만 있음 취직해서 회사도 다닐 텐데 말야.  미리 잘 부탁해~"


원래도 활달하고 재주가 많은 친구였지만, 넉살이 늘었다. 확실히 같이 종업원 입장에서 일할 때보다 본인이 사장이 돼서 자기 가게를 운영하니 더 열심히 했을 테고, 마음가짐도 달랐을 터다.


"그 사람은 계속 보고 있니?"


군에 있는 동안은 휴가를 나왔을 때 민아를 따로 만나지는 않았었다. 짬밥이 없을 때는 고참의 허락에 공중전화를 쓸 수 있을 때 간간이 안부 메시지를 넣거나 한두 번 짧은 통화를 했었고, 고참이 되어서는 특별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민아에게 가볼까 싶기는 했지만, 기은이와 만나고 다른 학교 선배나 친구들을 보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가 복귀할 날이 돌아오기도 했거니와, 아직까지는 경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민아와 대면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아의 가게에 갔을 때 마주쳤던 그 남자의 존재도 신경이 쓰였다.


아직 짧은 시간이었고 구체적인 아무런 얘기를 들은 것도 없지만, 이 정도로 업그레이드된 것을 보면 민아가 아무리 장사 수완이 좋더라도 대단한 스폰이 생겼거나, 그때 개업할 때 도와줬다던 - 편지에서 짧게 언급만 했던 - 그 남자와 관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민아의 인생이고 나에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궁금했고 민아도 이제 인생을 함께 할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랬다. 당장 돈이 좀 많다고, 그리고 잘 도와주고 있다고 해서 인성이 나쁜 남자를 만날까 봐 걱정도 됐다.


민아는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담배를 찾아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와,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였나 보네~ 기분 좋은데?"

"군에서 몇 번 안 되는 연락을 하는 동안 한 번도 물어보지 않더니"


내심 뜨끔했다. 군에 있는 동안 별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인지라 미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대놓고 지적을 하고 더구나 내가 그 남자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처럼 말해버리니 당황스러웠다. 마치 우리가 사귀었었거나 사귈 뻔한 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채아를 바라보았다. 얘가 뭐라고 생각할지..


"가끔 와. 해외에 많이 나가 있는 분이라 한국에 들어올 때 한 번씩 오셔."


날 놀리던 민아가 말을 이었다.   


"뭐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나를 좋아하긴 하는데 난 누구의 정부(情婦)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거든. 날 정말 원하면 다 정리하고 오라고. 좋은 분이셔. 양아치는 아닌 게 그렇게 확실히 얘기를 했더니 어느 정도 선을 넘지는 않더라. 가게 열 때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라 나도 오실 때마다 극진히 해드리지. 뭐 그런 관계야. 궁금한 거 말끔히 해소됐지?"


난 더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민아는 내가 얘기하는 것, 특히 질문에 대한 의도를 명확하게 캐치하고 그걸 갖고 장난스럽게 놀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대답을 해줄라치면 군더더기 없지만 내가 더 궁금한 게 남아있지 않도록 확실한 답변을 주었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채아 씨, 오늘 얼굴 봤으니까 다음에 선배들이 술 산다고 할 때 이리로 올게요. 그때 다시 봐요."


오늘은 이만 일어나 달라는 얘기였다. 난 2년도 넘게 못 봤다가 만난 민아랑 둘이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에이스라는 평가답게 바로 눈치를 챈 채아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인데 나에게 소개를 해주려고 일찍 나오게 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이 시간에 뭐 하러 나오라 그랬어.."

난 채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민아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평소에 이렇게 열심히 영업을 해야 하는 거야, 이 사람아! 으이구~"


언제나처럼 민아는 내 말을 가볍게 되받아치며 위스키 온 더락으로 얼음을 몇 개 넣어 잔을 건네준다. 우리는 잔을 가볍게 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참, 생각해 보면 그리 길지 않은 세월이었지만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 중심을 함께 보냈던 아이였다. 내가 미안한 게 많은 아이기도 하고.. 지금 자기 장사를 하며 가게가 잘돼 보여서 마음도 좋고, 너라도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술이 조금씩 올라오니 서서히 민아에게 경희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혼자 안고 가려던 생각이었지만.. 문득 민아가 사장 누나랑 계속 연락을 했다면.. 아니, 했을 것 같았다. 특히 가게를 열 때 자문을 구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고, 그렇다면 경희가 빚에 몰려 집창촌으로 팔려 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지직, 프흡... 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경희 소식은 들은 게 있니..?"


확인이 필요했다. 민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은 전혀 모르는 상태인지. 그거에 따라 내가 어디까지 얘기해 줘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좀 취했구나? 너가 경희 얘기를 먼저 꺼낼 줄은 몰랐는데.."

"글쎄, 난 너한테 얘기해 준 그 뒤로는 아는 게 없어. 알다시피 이 가게 열고 운영하느라고 그동안 영혼을 갈아 넣었거든. 망하지 않으려고. 넌 지금 이런 모습을 보니 엄청 잘되는 줄로만 알겠지만, 사연 많았다구.."


"사장 누나랑은 연락 안하구?"


확실히 알려면 한번 더 체크가 필요했다.    

  

"넌 해? 난 안 해. 사장 언니랑 참 친했지만, 그 언니랑 연락하면 너랑 경희 생각이 나서.."

"그래서 미안하긴 하지. 우리한테 참 잘해줬었는데 말야."


"맞아.. 나도 비슷한 처지.. 나중에 번듯한 직장 들어가고 잘 되면 좋은 선물 챙겨서 그때쯤에나 찾아가 볼까.. 지금은 좀 그렇다."


"민아야.."


난 조용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그러나 최대한 간결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해줬다.

내 이야기를 듣는 민아의 표정은 별로 변화는 안보였지만, 점차 굳어지고 있었다. 내 이야기는 이미 끝났지만 잔을 들고 있던 채로 굳어져 버린 민아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점을 잃어버린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오르기 시작했다. 울음이었다. 소리 없는 조용한 울음.


가게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지만, 내 귀에는 민아의 절규가 생생히 들려왔다.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목이 메어 아파오던 차에 소리 없이 절규하는 민아의 얼굴을 보면서 내 가슴도 다시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잔을 채우며 말없이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가게 됐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한탄할 마음이 왜 없겠냐만, 지금은 예기치 못한 큰 충격에 민아의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한 병을 비우고 두병, 세병... 어느 순간 눈을 뜬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였다. 아차, 술 먹다 취해서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삐삐의 시계는 4시를 넘어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민아는 자리에 없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았다.


"좀 더 쉬지 왜, 너 잠든 지 10분도 안 됐어. 술이 많이 약해졌네.."


주방에서 나온 민아는 내 손에 얼음물을 건네 주었다.

난 얼음물 한 컵을 시원하게 마시고는 민아에게 말했다.  


"이만 가볼게, 민아야. 오늘 반가웠고, 이런 소식 전하게 돼서 미안하다..."

"내가 죽일 놈이지......"


"알아봤는데, 벽제리 묘지에 무연고자 유골을 봉안한 추모공간이 있는데 경희는 거기에 있대.

 조만간 시간 내서 같이 가보자."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데 민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


"가지 마, 재용아. 나 오늘은 혼자 두고 가지 말고 곁에 있어줘. 제발..."

"오늘 문 닫았어. 채아도 보냈고. 내가 오늘 어떻게 손님을 받을 수 있겠니.."


그 말을 듣고도 차마 떨치고 가버릴 수는 없었다.


우린 다시 자리에 앉아 애꿎은 술만 다시 비우기 시작했다. 미루어 짐작이 됐다. 나도 처음 경찰 선배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며칠을 여인숙에 틀어박혀 술로만 지새우지 않았던가. 나로 인해 약간의 불편한 관계는 있었지만, 경희는 민아가 먼저 알고 친하게 지냈던 아이였다.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민아 나름대로의 추모의 시간이 필요할 터였지만 충격적인 비보를 처음 들은 날, 생각해 보니 민아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별다른 말없이 간간이 담배를 피우며 몇 병을 더 마신 우리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아가 영업을 쉬는 날, 함께 경희를 추모하러 찾아가기로 했다.


이야기의 화제는 서서히 나의 군 생활과 대학생활로 옮겨지고 있었다.

민아는 내가 대학에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기보다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직감이었다. 난 부인하지 않았다.


"경희한테 그것 때문에 더 미안해하지는 말아. 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난 건 경희가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르던 상태였으니까.."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민아는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난 간단히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얘기해 줬다.

그리고 군대 가기 전날, 민아의 삐삐에 제때 대답 못하고 잠들었다가 '우린 영원한 친구'라고 보내준 메시지에 얼마나 감동했고 고마웠었는지를 얘기해 줬고, 그러고 나서 논산으로 내려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그 아이가 집 앞에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엉겁결에 부모님의 차에 함께 타고 내려가 훈련소 입소를 배웅해 줬었다는 걸 말해줬다.


"그 친구가 널 엄청 좋아하는구나. 그 아침에 무턱대고 집 앞까지 찾아갔다니"


술기운이 잔뜩 오른 난 그동안의 상심을 쏟아내기라도 하듯이 그녀가 변해버렸고 그 변화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 정작 제대를 했건만 1학기가 종강 후 방학을 다 보내고 2학기가 되어 복학을 한 지금까지 얼굴도 제대로 안 보고 있는 이 답답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 없는 동안 한 학기 간 뉴욕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자기 삶을 살면서도 날 기다렸고 우린 계속 사랑을 이어나갔어.  그런데 친구들과 인도로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변화가 생겼어.  

인도의 낯설면서도 심오하고 철학적인 문화와 분위기에 매료된 것인지, 이젠 '사랑'에만 매달리지 않겠다는 아이가 되어 버렸지.


그녀의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과 태도가 변화하는 과정일 수 있겠는데, 속시원히 말을 안 하니 그것조차 내 추축일 뿐이고.. 난 머리로는 그렇게 이런저런 해석을 해보지만, 내 마음이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지.  그녀의 편지는 점점 뜸해지고, 우린 얼굴도 못 보는 채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어.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한 뒤에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 그녀가 변했다고, 즉 마음이 떠나갔다고 생각했고, 서운한 마음에 봐도 못 본 척 일부러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어.  그녀는 다른 사람이 생긴 게 아니라며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지만, 남자의 자존심이 무너져 버리는 내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어. 이해를 못 하는 거겠지.  내 품에 품었던 사랑하는 여자와 이젠 친구처럼만 지내자고?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용납할 수 없던 내게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


… 그렇게 차츰차츰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야."


휴.. 말을 하고 나니 스스로 놀라웠다. 민아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뭐랄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 아직까지 인연이 끊어지지 않은 민아와 함께 있을 때면 내 세계가 아닌 곳에 잠시 머무르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또 이곳이 바로 내 세계인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잠시 동안 생긴 화이트홀을 통해 시공간의 포털 속으로 들어와 머나먼 은하계의 외딴 행성에 불시착한 느낌이랄까?

술에 취해 몽롱한 기분에 그런 느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내 뇌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 내가 계속 그 세계에 남았었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 형에게 붙잡혔을 때에도 내가 좀 더 완강히 거부했았다면..

이 사람들과 함께 했더라면, 그때 더 돈을 열심히 벌어서 내가 당당히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래서 경희와 준혁과 함께 했더라면, 경희도 할머니를 잘 모시고 할머니도 더 생긴 손녀 손주들을 이뻐하며 맘 편히 우리 같이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경희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버리진 않지 않았을까? 민아도 지금처럼 여의도에 있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그랬다면 사랑은커녕 기은이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을 텐데..‘


불과 몇 년 전, 그 거칠었던 풍랑 속을 헤치던 과거를 반추하며 온갖 상념이 밀려들었다.


생각에 젖어있는 사이, 어느새 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다가와 앉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은 나에 대한 안쓰러움과 함께 약간의 놀람이 서려 있었다.


“너가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는 거 여태 지내면서 처음 봤어.”

“….. 그 친구, 많이 좋아하는구나?”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손을 잡았던 민아의 팔이 날 잡아끌었다.

우리는 더 가까워져 밀착되며 이내 민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나 나나 우리 팔자도 참..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그대로인 채 민아의 입술이 서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난 멈칫하며 그녀를 밀쳐내지는 못한 채 주저했고, 그런 나에게 민아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괜찮아.. 나 오늘 너랑 있을래. 첫 정은 아니지만, 넌 내게 첫사랑이니까. 주고 싶어. 내가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이 일로 너 붙잡고 주저않히진 않을 테니까 다른 거 생각하지 말라구..“


마침내 두 입술이 서서히 포개어졌다.



.

.




Dear 재용오빠..

잘 있었어? 정말 오랜만에 연락하는구만. 건강하구? 형식 선배가 그러는데 5월 1일 날 제대라며? 며칠 더 있는 거라 억울하겠지만..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내리라 생각해. 형식 선배가 그러는데 얼마 안 남으면 그때부턴 날짜로 세는 것이 아니라 끼니(식사=하루 ×3)로 센다며? 그건 너무 잔인한 것 같아. 괜히 숫자가 많으면 같은 날이라도 왠지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잖아. 그리고 가요톱 10이 얼마 남았나도 중요하다며? 이제 3번만 더 보면 제대네.
제대할 때 되면 밥도 안 먹고 그런다던데 오빠는 그러지 마라. 가뜩이나 말랐는데 거기다 밥까지 안 먹으면 안 되겠지?  이제 제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그러면 마음도 싱숭생숭 해질 테고. 손에 잡히는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책 한 권 사서 보내는 거야. 알퐁스 도데의 ‘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고 다 아는 얘기지만. 그거 말고도 재밌는 얘기 & 짧은 얘기가 실려 있어서 그냥 가볍게 읽기에 좋을 것 같더라구.  나는 ‘스갱씨의 염소’랑 ‘노인들’이 재밌더라.

오빠가 군대 가고 나서 뼈저리게 느껴진 게 있다면, 내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는 거야. 뭐 예전에는 ‘오빠 + 나’의 인간관계였다면 오빠가 군대 간 이후, 그것도 시간이 꽤 흐른 후엔 기은이라는 사람 혼자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더라구. 그래서 예전엔 오빠 덕분에 안 친한 사람들과도 신경 쓰고, 써주면서 살았는데 이젠 그 사람들도 나에게 신경 안 쓰고 나도 그렇게 되더라구.  이건 최근에 특히 느끼고 있어. 그래서 뭐… 오빠 덕분에 남들 다 힘들어하는 1, 2학년 때 난 주위로부터 신경 씀을 받고 챙김 받으면서 지낸 것 같아서. 고맙다고.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아니 쫌 오래전인가.  방 정리하다가 오빠가 예전에 보낸 편지를, 그중 일부를 읽어봤는데. 그땐 못 느꼈던 건데 지금 보니 이상한 구절이 있어서.  정확한 표현은 생각이 안 나는데 뭐 대강 내가 다른 남자친구가 있는 양 알고 있는 듯한 그런 구절이 있더라구.  정말 답답한 건 오빠한테도 솔직하게 열심히 떠들어 대는데도 이해를 못 한다는 거야. 정확히 말해서 내가 오빠가 싫어졌다던가 미워졌다던가 아님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든가 그런 게 아니야.  

내 말은 난 “친구”라는 관계가 제일 소중하고 멋지고 가치 있는 관계란걸 깨달았고, 그래서 오빠랑도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거야.  연락 한번 안 하다가 갑자기 이런 편지 보내면 웃기지도 않겠지만. 오빠랑 서로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사실 얘기라고 해봤자 나 혼자 떠들다 끝날테고. 오빠는 듣고만 있을 테니 글로 쓰는 것이랑 별 차이 없을 것 같더라구.  어쨌든 “솔직하게 말하기 + 나 혼자 떠들기”를 안 하면 기분도 더 나빠지고, 더 힘들 것 같아서 이렇게 좋은 봄날에 깨는 소리 써서 보내… 어쨌든 곧 제대하는 거 축하하고.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남은 세월을 어떻게 지낼 것인지 계획 세우면서 알차게 보내기 바래. 건강하게 잘 지내.

1997. 4. 13  기은이가


Ps : 이제 동두천에도 꽤 정이 들었겠군…

Ps 2 : 갑자기 연락했다구 당황하지 않길 바래.

Ps 3 : 내 맘대로 정하고 나 혼자 떠드는 게 특기니까, 사실 오빠가 내 생각을 이해 안 해도 별수 없겠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런데 모른 척하고 아는 체 안 하고 살기로 했으면 미리 말 좀 해주지. 난 원래 좀 잘 당황하거든.

Ps 4 :  Ps 3이 오빠 말투인 거 알아?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Dear 오빠야..

오늘은 봄이라고 하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던 것 같아. 오빤 잘 있었어?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 월초나 월말이 아니라 그래도 할 일이 많지? 오빠가 보내준 초콜릿이랑 사탕은 잘 받고 잘 먹고 있어. 너무너무 고마워.  원래 사실 얼마 전부터 편지 쓰려고 했었는데 괜히 소포 받고 나니까 쓰기가 싫더라고. 마치 그래서 쓰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니거든. 늘.

어쨌든 참 오랜만에 오빠한테 연락한다. 기분이 묘하네. 요샌 회의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살고 있어. 그냥 모든 게 허무한 것 같아. 그 원인 중 하나는 내가 늙었다는 걸 요새 많이 느낀다는 거야. 토탈 이클립스라고 영화 비디오를 봤거든? 오빠도 아마 알걸? 내가 오빠랑 비디오방 갔을 때마다 만지작만지작 거렸으니까. 나중에 보려고 아껴두고 아껴두다가 못 참고 얼마 전에 봤거든.

거기서 시인 랭보가 그래. 이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그리고 사랑하냐는 질문에 ‘아주 좋아한다’는 대답을 해. 근데 그게 맞는 거 같아.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내 생각엔 아주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진정한 순수한 사랑은 어쩌면 이 세상엔 없는 것 같아.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뀐 걸 보면 정말 내가 엄청 늙은 것 같아. 난 정말 이 세상은 그런 사랑 덕분에 절대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믿어왔었거든.

근데. 글쎄… 모르겠어. 그렇다고 ‘아주 좋아한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 강도가 약하거나 그런 건 아니라고 봐. ‘아주 좋아한다’는 말이 어쩜 내 맘에 더 들어서 그럴지 모르지만 더 좋게 들려..  글쎄.. 요샌.. 왜 그런진 정말 모르겠는데 오빠 생각을 하면 괜히 기분이… 뭐랄까… 슬퍼지는 것 같아. 왜냐구? 정말 모르겠어. 근데 그래. 오빤 왜 그런지 알아? 하긴 본인이 모르는데 오빠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그렇다고.

지금 오빠가 녹음해 준 Tape을 듣고 있어. ‘필승’이 나오고 있어. 근데 ‘-삑-‘ 소리가 나네.  아마 가사 중 심의에 걸린 걸 그렇게 지웠나 보지? 정말 신기한걸?
요즘 참 많은 일들이 있었어.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난 뭐 거의 참여한 일이 없으니까. 95학번들이 대자보를 써서 학회실에 붙여 놓았어. 그걸 읽고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던걸.  
고등학교 친구들이나 동네 친구들 곁에도 난 없었고, 학교에선 소위 학교일에 관심 없고 적응 못한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 곁에도 난 없었고, 학교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 곁에도 난 없었다고 해. 그럼 난 어디에 있었던 건지… 그걸 작년부터 궁금해했었는데… 아직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오빠 곁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정말 신기하지?

이번 편지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관심 있어 한 내 얘기만 적은 거 같아 미안하네. 오빤 마음이 넓으니까 이해해 주리라 믿어.  요새 오빠랑 내 얘기를 친구들이 들으면 날 이해하긴 하지만 오빠가 불쌍하대. 난 오빠가 불쌍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빠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 오빠 요새 봄이지만 아직 추운 거 알지? 감기 걸리지 말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야만 해.

1996. 3. 7 일요일. 밤. 새벽에  기은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에게

Ps. 난 향수를 정말 좋아해. 향기가 좋거든. 비누향도 참 좋아.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향을 갖고 있단 말은 사실이야. 오빠도 오빠만의 향을 갖고 있다는 거 알아?  그 향은 꼭 곁에 있을 때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빠한테서 걸려온 전화에서도 맡을 수 있어.
그거 알아? 그래서 오빠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오빠인걸 안 적도 참 많아.  



Dear 오빠야..

잘 있었어? 난 지금 감기 때문에 약간 맛이 간 상태야. 오늘 새벽에 Bombay에 도착했는데 그땐 정말 다들 쓰러지는 줄 알았어. 음식이 하나도 안 맞아서 거의 못 먹고 살았거든. 근데 여긴 맘에 들어. 우리나라 서울 같아. 그래서 좋아. 심지어 수정 언니는 거식증에 걸려서 음식냄새만 맡아도 넘기려 할 정도였다니까. 좀 쉬어서 그런지 잠이 안 오네. 예쁜 엽서도 별로 없고 우체국도 찾기 어려워서 연락 자주 못해. 이해하지? 다들 피곤해서 자고 있어. 몸은 맛이 갔지만 그래도 많이 배우고 뭔가 계기가 될 만한 여행인 것 같아.

아깝다. 오늘 아침에 날 봤다면 나의 야윈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밤에 안 자고 있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냥 오늘따라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게 만드네.. 봄베이 말고 다른 곳엔 차도 별로 없고 참 한적했어. 그리고 정말 놀란 건 인도인들의 신앙심이야. 길거리에 좀 큰 나무 심지어 오토릭샤와 가게 안에 항상 꽃을 걸어놓고 향을 피워놓고 곳곳에 널려있는 작은 사원을 지날 때면 바쁜 와중에도 경건하게 절(?)하는 모습을 보니까.  지금까지 나와 내 주변에서 갖고 있던 신앙심과 태도에 대해 약간 부끄럽게 생각되더라구. 정말 자신도 제대로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서 소에게 먹이를 주고 새 모이를 뿌려놓고 신전에 꽃을 바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 나에게도 있을까? 절대 아니다 싶어. 여기 와서 부딪혀보니까 내 부족함을 절실히 느껴.

사실 책 한 권 읽는 것보다 느는 지식은 덜하겠지만 사람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한 가지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면 지금의 인도의 모습이 우리나라 20~30년 전 모습과 비슷한데 점점 무분별하게(?) 우리나라틱해 진다는 거. 그게 좀 보기 안타깝더라. 오빠도 같이 왔으면 참 좋았을걸. 어쨌든 뭐. 내일 바다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생각 많이 나겠다. 내가 오빠 몫까지 다 보고 갈게. 사진도 벌써 2통이나 찍었어. 요새 한참 추울 때지? 건강하고 밝게 잘! 살아야만 해.

1996 1. 22 -> 날짜가 확실치 않아.

TO: 일병 정재용
경기도 양주군 남면 입암리 사서함 29-15호 무적태풍부대 (우:482-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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