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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혼자 남은 집은 전기도 끊기고 가스도 끊겼다.

매일 밤 빚쟁이가 찾아오던 2002년 봄.

by 순작

수능시험 성적표가 나왔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왔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지만 이미 가정이 파탄나버린 우리 집에서 나의 수능성적표는 그리 큰 의미가 되진 못했다. 부모님 두 분도 지나가는 말로 묻긴 했지만 큰 관심을 갖고 물어보거나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듯했다. 혹시 대학이라도 붙게 되면 등록금과 입학금이라는 수백만 원을 내놓으라 할 테니 두 사람 다 지레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시험은 어떻게 봤니?"


아빠는 이 한마디가 다였고


" 대학 가야 해서 돈 쓸 일 있으면 빨리빨리 계산해서 네 아비 집에 있을 때 얘기해. 또 나가버리면 돈 줄 사람 없어."


이건 엄마의 말이었다. 우리 엄만 정말 말로 자식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싸움이 잦은 집에 사는 청소년들은 크리스마스나 새해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차피 그날이 그날이기 때문에 큰 희망도 설렘도 기대도 없다.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 아이들은 어떤 일에서든 크게 좋거나 싫거나 대항하거나 하지 않는다.


20살이 되니 좋은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용돈이 필요하거나 준비물을 사야 할 때면 몇 날 며칠을 초조해하며 망설이다가


" 아빠, 돈이 좀 필요한테 주시면 안 돼요?"


배우가 대사 연습 하듯 수십 번 머릿속으로 연습을 하며 이후 아빠 입에서 나올 대사를 상상하며 마음 졸이고 걱정할 일이 줄었다는 뜻이다.

나의 첫 알바장소는 동네 편의점.


지금은 최저임금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내가 20살이던 2002년만 하더라도 그렇지 못했다.


동네라서 1400원. 번화가는 손님이 더 많으니 1600원. 백화점이나 마트는 2300원 까지도 줬던 때이다.

이래서 화장실 청소 알바를 해도 대기업 화장실 청소 알바가 낫다는 말이 있나? 아무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는 알바 시급을 그래도 많이 주던 곳이었다.


즉 그땐 사장 꼴리는 대로 주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별명은 알바천국이다.

지금도 본업 외에 물류센터 알바에 스터디카페 청소에 주말에는 쿠팡 물류센터 새벽알바와 블로그 포스팅 알바까지. 틈만 나면 일거리를 찾는 내 모습이 정말 일 벌레 같다.


남편과 아이들은 언제나 화기애애한데 나만 혼자 피곤에 절어어 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내가 돈 관리를 하니 남편은 돈이 필요하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갈 때면 나에게 손을 벌린다.


" 고마워. 내가 애들 데리고 나가서 좀 놀아주고 들어올 테니 혼자 좀 조용히 쉬고 있어.~"


"엄마~ 걱정하지 않게 조심히 다녀올게. 피곤할 텐데 쉬어~"


라고 말하며 아이들은 신나게 나가고 남편은 세상 다정한 남편. 좋은 아빠를 자처하지만 나 역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확실히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일벌레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빠는 책임지지 못할 빚을 지고 엄마와 언니와 나만 남겨두고 또 집을 나갔고 연락 두절 된 상태였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찾아 재산 정리 후 이혼을 하겠다며 엄마 역시 집을 나갔다.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나 엄마는 집을 나가서 살던 그때 아빠 찾는 것과 이혼을 도와주는 어떤 아저씨를 만나 몇 개월 한 집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다.


2002년 봄.


부모님은 각자 나름의 타당한 사정과 이유로 가출을 했다.

헐.. 네 식구가 살던 집에는 22살 언니와 20살 동생. 이제 갓 스무 살이 넘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자매만 남았고 부모님이 떠난 집은 이제 더 이상 가스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밤마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욕을 하며 현관문을 발로 찼고,

언니는 점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져 새벽에나 잠깐 들어와서 씻고 나갔고 대부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어두워지면 컴컴한 방에서 사람이 없는 척 숨죽이고 있었다.


밖에서 욕하는 소리가 사라져도 혹시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들킬까 봐 한참을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화장실을 참으며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였고 난 너무 무력했고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많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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