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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작 Sep 04. 2024

15화. 성인오락실에서 알바를 했다.

언니는 날 경멸했고, 아빠는 가출 중이었고 엄마는 내게 2차 가해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은 아침부터 힘들고 피곤하다.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물류센터로 알바를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각보다 굉장하다.

꼬박 8시간을 일하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재우면 고작 40분 정도 눈 붙이고 일하러 나가야 하는 날이라 아침부터 굉장히 예민하다.


물류센터 알바는 새벽 1시 30분에 시작해서 아침 9시에 끝나기 때문에 아이들을 케어하는데 크게 문제 되지 않아서 선택한 알바로 나만 힘들면 된다는 맘으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나의 피곤함을 함께 느끼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슬픈 맘이 든다.


본업인 직장에 허락을 받았냐고 묻는다며 노노.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직장은 투잡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생각엔 본업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래도 다른 일도 하게 되면 몸이 피곤할 테고 그러면 본업에 집중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본업에만 집중해서 살다 간 밥도 못 먹고 살 지경이 되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내 월급만 안 오른다. 구내식당이 없는 회사의 직원들은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점심값이 나오긴 하지만 급여명세서를 보면 7천 원이 채 되지 못하는 나의 한 달 식대는 어떻게 책정된 건지 참 궁금하지만 운영팀에 물어보기 껄끄러운 문제라 모두들 수군거리는 선에서 끝이 난다.


올해 초 새롭게 책정된 식대를 보고 동료들과 식대의 책정 기준을 궁금해하던 중 동료 한 명이


"회사 식대가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 가격이 기준인가?"


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헐. 어쩜 정말일지도.'


현실이 이러하니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휴게실은 만원이다. 점심시간 10분 전 미리 나가서 전자레인지에 밥을 데워놔야 제시간에 먹을 수 있고 아침부터 도시락 자리를 맡아놓는 건 말해서 뭐 하랴...


'난 언제나 열심히 사는데 왜 항상 가난할까?'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이 많다.

14화에서 적었듯 부모님의 가출과 외도 그리고 빚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막연하게 걷고 있는 기분이다.


 21살 여름. 교복전문점 에서 교복 판매 알바를 했을때 사장님이 내게 물었던적이 있다.


" 좋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아나?"


"글쎄요. 모두가 잘 사는 세상 아닐까요?"


내가 대답하니


" 아니지.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은 절대 좋은 세상이 될 수 없어. 좋은 세상이란 열심히 일 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야."


고려대학교 명문대  출신이셨던 사장님의 말이 급 떠오른다.

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님이 틀림없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이 가난해서 나도 덩달아 가난했다. 부모님이 사주지 않아 못 먹었고 못 가졌다.

부모님의 빚은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난 항상 억울했고 지금도 그렇게 산 부모님을 원망하는 나에게 누군가 그래도 부모님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 아빠는 다른 여자에게, 엄마도 다른 남자에게 가버리고 둘 다 연락도 끊긴.. 전기도 끊기고 가스도 끊긴 밤마다 빚쟁이가 찾아오는 집에서 밤 새 화장실을 참아가며 혼자 소리도 못 내고 울어보면 그 소리가 싹 들어갈 거예요."


날마다 나가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방학기간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러나 편의점 일만으로는 가스비와 수도세를 내고 전기요금을 내며 차비와 학비 등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알바를 찾던 끝에 부천 오정동에 있는 성인오락실에서 약 3개월간 알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차비도 없는 처지에 사람을 구하는 곳은 어디든 가서 일을 해야 했고 찾아간 성인오락실에서 내가 했던 일은 재떨이를 비우고 자판기에 코인을 채우는 일과 음료수 심부름이었다.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우리  언니는 내가 성인오락실에서 일을 하다는 것을 알고는


"넌 그런 데서 일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냐? 네 친구들도 너 거기서 일하는 거 아냐?"


하고는 경멸의 눈빛으로 나는 쏘아보고는 더 이상 나와는 말도 섞지 않았다.

밤 새 오락실에서 일을 하고 오면 내 손에서는 담배 찌든 냄새와 동전 비린냄새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쉬고 씻고 쉬고 싶었지만 바로 편의점 알바를 가야 했다.


성인오락실. 역시나 좋은 곳은 아니다.

나중에 나의 아이들이 나와 같이 이곳에서 알바를 하는 것을 알면 나 역시 아이 머리를 빡빡 깎아 집에 들여앉힐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해보니 그렇게 나쁜 곳도 아니었다. 뭐 영업장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내가 일했던 곳은 조선족 여자사장님이 운영하던 곳으로 그녀 역시 6살 딸아이를 키우는 아기엄마였다. 


대단히 잘해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의 따뜻함은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종업원들도 몇 명 있었는데 대부분 조선족으로 사장님과 가리봉동 노래방에서부터 함께 일했던 오래된 관계였고 나름 각자의 사연들이 있었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대학생이 왜 여기서 일하냐며 신기해하는 면도 있었지만 대략 서로 사연을 이야기하고 들어보면 나처럼 암울하고 어려운 사정들이 있었고 우린 서로 어려운 처지라는 동질감에 그럭저럭 트러블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손님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평범한 직장인들도 퇴근하며 자주 들렀고 멀쩡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게 그 당시 나에게 더욱 놀라웠다. 하긴 지금 생각하면 다 사람 사는 곳인데 뭐가 그렇게 다르겠나.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뿐이지.


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밤새 재떨이를 비우고 코인을 채워 넣는 일이 아니었다. 


술 취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더욱 힘들었던 건 코인을 한소쿠리 뽑아오면 돈을 준다고 하고는 코인을 가져다주면 돈을 안주는 손님들. 당시 코인 한 소쿠리는 1만 원이었고 손님은 나중에 준다며 돈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손님이 돈을 주지 않으면 사장님은 돈 받아롸고 내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거나 손님과 몸싸움을 해서 받아냈다.


사실 자판기 앞에는 선불, 셀프라는 메모가 붙여져 있었지만 대부분 한번 머신 앞에 앉으면 화장실만 겨우 가는 수준으로 종업원들을 부려먹었고 서비스업이라 어쩔 수 없이 음료수나 담배심부름 등을 해야만 했다

술 취한 손님과 남자종업원들과는 종종 몸싸움도 하고 시비도 붙었고 손님이 공들인 머신이 터지기라도 하면 1-3만 원씩 상품권을 팁이라며 받았던 적도 자주 있었다. 가끔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거나 한번씩 엉덩이를 툭툭 치는 남자손님들로인해서 속상하고 당황스럽고 화나는일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같으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지만 20년전 당시만 하더라도 내 상황에서는 그냠 아무 일 없는 듯 지내야만 학교를 다니고 밥도 사먹고 할 수 있었다.


아.. 정말 오래된 기억이다. 지금은 이렇게 글로 풀어낼 수라도 있지만 엄마와 언니 외에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내 입에서 나온 적이 없었던 이야기이다. 언니 말대로 나 스스로도 성인오락실에서 일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창피했한맘이 있기에.


언니는 날 경멸하며 부끄러워했고,

엄마는

" 어쩔 수 없지 그런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니? 그만두지 말고 요즘처럼 어려운 때 돈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


라는 말로 두 사람 모두 나에게 2차 가해를 했다. 아빠는 여전히 가출 중이었다.

가족은 날 아프게 울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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