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사회적 관계망이 있다면
”꼭 혈연일 필요는 없는 존재요. “
쌀쌀해질 무렵, 영어학원은 일찌감치 다가올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데 한창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아이들과 함께 케이크를 꾸미는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한 날인 만큼 케이크도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마침 근처에 제빵 학원이 있었습니다. 케이크 장식 하는 법을 배워서 수업에 활용도 하고, 케이크도 좀 먹을 겸 '커스텀 케이크 마스터' 과정을 신청했습니다. 1개월 간 아이싱부터 캐릭터 디자인까지 골고루 배웠습니다.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시고 잘 못하면 도와주셨습니다. 가르치는 일을 하다 잠깐 배우는 입장이 되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러던 와중 한 방송국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던 시사교양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원을 촬영하고 싶다는 이야기에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말씀드렸습니다.
영어학원으로서는 크리스마스 관련 수업, 파티를 준비하는 가장 바쁜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원치 않거나 부모님들이 촬영을 불편해하실 수 있어 일일이 양해를 구하는 것보다는 촬영을 하지 않는 것이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학원을 촬영하지 않는 조건으로 재차 연락을 주셨습니다.
출연을 결심했던 것은, 제가 평소 즐겨보고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어서가 가장 컸습니다. 종종 혼자 밥 먹으면서 정적이 흐르는 방 안을 채우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인가구의 고립’을 주제로 한 내용이 어쩌면 혼자 밥 먹으면서 방송을 보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촬영 일정을 잡았습니다.
이런 방송들이 하나 둘 만들어지면서 고립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다면, 정책적으로 조금 더 관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습니다.
총 세 번의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벌써 끝났나?’ 할 정도로 속전속결이었습니다. 아마 1회 분량에 전문가 인터뷰 등 다양한 내용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잠깐 출연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치아교정이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교정 초기보다 약간은 업그레이드된 외모로 첫 촬영에 임했습니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침을 먹고 그룹홈 사모님과 영상 통화를 했습니다.
오랜만의 통화에 촬영을 잊고 한바탕 이야기 꽃을 피우다 서둘러 제빵 학원으로 향했습니다. 카메라 감독님께서 열심히 케이크를 만드는 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셨습니다. 만든 케이크를 들고 평소처럼 학원에 출근했습니다. “주디쌤 오늘 왜 이렇게 예뻐?” “이 케이크는 또 뭐야?” “아 그래요?” 웃으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습니다.
두 번째 촬영 일에는 프로그램의 내레이터이시면서 전 LG인화원장이기도 하신 이병남 선생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줄곧 LG핸드폰을 써오긴 했는데, 교육 연수 기관인 인화원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근데 선생님이랑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지?’
제가 너무 모르면 어색할까 싶어 선생님 이름을 검색해 벼락치기를 했습니다.
구불길을 한참을 걸어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도착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은 너무나도 따뜻한 인상으로 저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마치 영화 ‘인턴’에 나오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저를 반겨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제빵 학원에서 만든 케이크도 선물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감대도 많았습니다. LG핸드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미국에 살았던 경험들, 서로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은 1인가구 고립을 주제로 대화할 때였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지인 중 그룹홈을 운영하고 자립준비청년들을 돕고 계시는 분들이 계셔서 제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해 주시는 듯했습니다. 1인가구로서의 어려움, 외로움에 대한 생각들을 폭넓게 나눴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하시다 은퇴 후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은퇴 이후의 일상, 건강 관리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하다보니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기자님이 충분히 찍었으니 잠깐 쉬어가자 하셔서 겨우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OO 씨가 진행을 참 잘하네!”
이전에 다른 프로그램을 촬영할 때 프랑스인 친구랑 수다를 떨며 이야기를 이어나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께서 대화하면서 칭찬도 위로도 많이 해주셔서 힘이 났습니다.
”오늘 좋은 친구가 생겼네! 다음에 또 봅시다! “
식사를 마치고는 인터뷰 장면 촬영이 이어졌습니다. 질문에 답을 하다 앞을 보니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기자님이 저보다도 더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습니다. 애써 울음을 참으며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질문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OO 씨에게 가족이란?”
“음.. 꼭 혈연일 필요는 없는 존재요. “
세 번째 촬영일에는 스튜디오에서 다 함께 모였습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시는 분들과 모든 제작진분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함께 사진을 찍으신 분들의 사연은 또 방송에 어떻게 나오게 될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방송은 정말 따뜻하면서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내레이션과 함께, 고립과 외로움의 문제를 사회적 시각으로 조명한 내용들이 이어졌습니다.
“홀로 보내는 시간, 고독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시대, 외로움과 고립은 대개 사회적 취약 계층의 문제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통계청 조사 결과, 우리 국민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어려울 때 도움받을 사람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OECD 공동체 영역 국가별 순위에서도 최하위권이었습니다. “
SNS 등을 통해 더 많은 이들과 서로 연결된 듯 보이는 현대사회, 어느 때 보다도 고도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늘은 더 짙어졌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 누구나 예기치 못한 실패를 경험하고 고립의 상황을 맞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딘가 기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조차 없다면, 이는 개인 노력만으로 극복하기엔 그 한계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고립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장, 정부, 개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한 전문가의 의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프로그램에서 현상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다양한 국내외 사례들이 소개되어 더욱 유익했습니다.
외로움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했던 영국의 '사회적 처방(Social Prescribing)'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을 원인으로 정서적 어려움이 초래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의사가 약물 대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방법을 대안적으로 처방하는 정책입니다.
강원도 원주의 한 보건 진료소에도 이러한 ‘사회적 처방’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참여자들은 전문 치료사들과 예술 활동 프로그램도 함께하고 다른 참여자들과 교류하며 사회적 관계를 회복해 나갔습니다.
중장년 1인 남성가구의 고립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자조모임, 각 지역의 1인가구 지원센터의 사례를 통해서도 관계망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뒤이어 광주광역시에서 추진한 도시 재생사업으로 시작되어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함께 교류하며 살고 있는 청춘발산마을이 소개되었습니다. 시장, 정부, 개인 모두의 노력이 어우러진 지역사회 공동체를 보며 때로는 혈연보다도 더 선명하게 이어지는 사회적 관계망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회 전반에 걸쳐 튼튼한 사회적 관계망의 중요성이 시사되는 듯했습니다. 혈연을 넘어선 사회적 가족의 필요성을 살면서 많이 실감했던 터라 공감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사회의 한 일원으로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연결망 덕이었습니다. 가출하고 나서도 많은 분들의 도움을 통해 그룹홈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취업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도 자립준비청년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면서, 취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조금씩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내레이션 멘트가 흘러나왔습니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출연자분들과 제작진 분들이 다 함께 찍었던 단체사진은 찰칵 소리와 함께 액자로 바뀌며 여운을 남겼습니다.
“서로의 문을 두드리고 안부를 묻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만으로 우리 사회는 조금 더 가깝게 연결될 테니까요."
촬영 후 받은 출연료로 다른 셰어하우스 사는 자립준비청년들과 다 함께 회식을 했습니다. 함께 촬영한 기자님과도, 선생님과도 종종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기자님과는 콘서트도 다녀오고 바쁜 와중에도 집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편한 언니와 대화하듯 서로의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하루는 이병남 선생님과 밥을 먹다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내레이션 처음하시는 것 맞으세요?
어떻게 이렇게 편안하게 잘하셨어요?“
” 아유 연습 많이 했지~“
선생님은 방송에서 제가 겨우 울음을 참는 표정을 보며 참 마음이 쓰였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드릴 수 있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촬영을 통해 사회적 연결망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원래도 사회적 고립, 고독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촬영 이후 관련 기사들을 꾸준히 살펴보곤 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해결책을 찾아 나서고 있고 전국 각지에 사회적 자원들이 있는 만큼, 잘 활용하여 고립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고립상황에 있거나 고립 경험으로부터 회복 중인 분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아이들과 케이크도 잘 만들고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파티도 즐겁게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원장님이 들어가서 쌤 수업하는 것 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