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뮤지컬 강사가 된 주디쌤!
"너희들은 부모님이 왜 좋아?"
새해가 되고 몇 주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다른 강사님이 교실에 들어오셨습니다. "원장님이 들어가서 쌤 수업하는 것 좀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수업을 참관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선생님에게 인수인계 할 때, 수업에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을 때. 제가 인수인계를 할 일은 없었습니다.
“저도 신이 나는데요? 강의는 잘하는데 주디쌤이 너무 신나는 말투로 수업해서 그런가 봐요.”
다른 강사님께서 제 수업을 피드백 해주셨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에 아이들이 지루해할까 열심히 오버하며 텐션을 끌어올렸던 기억이 났습니다. 원장님께서 아이들이 너무 산만해질 것을 우려하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쌤, 뮤지컬 수업 해볼래요? 취미가 코인노래방 가는 거라며.”
“네, 한번 해볼게요.”
영어 뮤지컬 수업을 하고 싶다고는 했지만 실은 하고 싶은 마음 반, 부담 반이었습니다. 뮤지컬과 요리 수업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체력소모가 더욱 커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수업을 하려니 몸치라 걱정도 되었습니다.
제가 한 번 수업하는 모습을 보시고 흡족하셨던(?) 원장님은 뮤지컬 수업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영어로 요리에 이어 뮤지컬도 함께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요리 수업을 하면서 수업 준비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수업을 어떻게 구성할지 꼼꼼하게 고민했습니다. 노래도 외우고, 새롭게 동선도 넣어보고 앵콜송 안무도 직접 만들어가며 수업을 준비했습니다.
학습적인 요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단어카드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한동안은 근무 시간 외에도 온종일 수업 준비에 매달렸습니다. 마치 제가 무대 연출가가 된 것처럼 설레었습니다.
어색하지만 춤 연습도 했습니다. 다행히 동작들이 어렵지 않고 영상 자료가 있어 보여주면서 함께 춤을 추는 것이라 수월했습니다. 수업 중 동선 지시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동선에 맞춰 척척 움직이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무대에서 신나게 연기력을 뽐내는 아이들과 공연을 만들어나갔습니다.
“벌써 끝났어요?”
고객 만족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수업을 거듭하면서 아이들이 영어 스피킹에 자신감이 붙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때로는 같은 내용의 수업을 해도 아이들마다 받아들이는 속도가 달라 ‘언어습득에 있어 재능이 중요한가?’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한 아이를 통해 배웠습니다.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
“처음 하는 거라 어려운 게 당연한 거야. 다 할 필요 없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
”근데 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잘해보고 싶어요. “
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실력은 좀 떨어졌지만 태도가 참 좋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며 재능 못지않게 태도도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금 더디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제 스스로도 ‘너무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욕심내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비켜!”
“나한테 얘기하는 거니? 내가 니 친구야? 똑바로 다시 얘기해! “
아이들을 재미있게 가르치려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단호하게 지도하는 법도 많이 배웠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항상 즐거운 일들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루는 한 아이의 말에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수업 중에 게임을 이기기 위해 반칙을 썼습니다. 다른 선생님이 ‘그건 공정하지 않아’ 지적하자 아이는 “공정하지 않아도 이기면 되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고 꽤나 놀랐고 동시에 씁쓸했습니다.
커닝하거나 거짓말하는 아이를 어떻게 혼을 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예의를 갖추지 않거나 심지어는 책상을 밀치는 아이 앞에서 웃는 얼굴로 수업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단호하게 짚어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업 끝나고 일대일로 잠깐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적절한 대응은 상황마다 달라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훈육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경험 많은 선생님과 원장님 조언을 들으면서 반영했습니다.
때로는 기복이 심한 몇몇 아이들을 케어하기 쉽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수업 내내 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나는 한 시간만 봐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아이를 키우시는 부모님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새 학기가 되었는데 신규 원생 증가 폭이 작년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도저히 공부가 안 맞는다며, 어떤 아이들은 실력이 일취월장하니 다른 학원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원생 수가 점점 줄어들며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리는 듯했습니다.
“학원 강사 일은 계속하려고? 갈수록 아이들이 없다는데…”
주위에서 ‘안정적인 공무원 도전은 어떠냐’, ‘갈수록 아이들이 없다는데’, ‘영어 교육이 AI로 대체된다는데’는 등의 우려를 보탰습니다. AI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갈수록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고 피부로 느끼고 있던 터라 약간은 신경이 쓰였습니다.
아이들도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은 듯했습니다.
“너는 뭐가 되고 싶어? “
“정말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선생님 나중에는 로봇이 커피 다 만든다는데 바리스타 될 수 있을까요? ”
뭘 하고 싶냐는 것, 제게 물어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고민해 봐도 뚜렷한 해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안고 가정의 달인 5월이 찾아왔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돈, 가족, 건강 중에 뭐가 가장 중요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돈보다는 건강,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한 게 더 중요해요. " 하던 아이, 단호하게 "돈이 더 중요해요. " 외치던 아이의 모습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 아이는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며
"가족이 있으면 엄마 아빠가 맛있는 걸 사주니까 돈도 버는 거예요. "
하며 배시시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세상 진지한 모습으로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드릴 카드를 정성스럽게 꾸몄습니다. 열심히 편지를 쓰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부모님이 왜 좋아? “
‘같이 배달시켜 먹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항상 옆에 있으니까’, ‘같이 놀아주니까’ 하며 저마다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이 정말 예뻤습니다. 몇몇 아이들은 '뭐 그리 당연한 것을 물어보나' 하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순간 누구보다 든든한 가족이 있는 아이들이 내심 부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엄마 있어요?”
“선생님은 엄마 아빠 왜 좋아요?”
“선생님은 집에서 누가 제일 좋아요?”
"선생님 집에서 누가 제일 어려요?
아이들도 제게 궁금한 것들이 많았는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수업 열심히 들으면 얘기해 줄게!' 하고 열심히 공부한 후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어버이날에 이어 스승의 날도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스승의 날 뭐 갖고 싶어요? 뭐 좋아해요?"
"나는 너희들!"
능청스러움도 많이 늘었습니다.
"저도 좋아해요!"
"아니야 내가 더 좋아해, 저는 선생님 우주만큼 좋아해요!"
"저는 OO이 보다 조금 더 좋아해요!"
스승의 날 선물 뭐 갖고 싶냐고 꼬치꼬치 묻는 아이들, 이게 꿈인가 싶었습니다. 함박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스승의 날 아이들이 정성껏 써준 편지에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정신없이 아이들과 수업하며 보람 있는 순간순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하려 SNS에 수업 준비하는 제 모습 등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종종 올렸습니다. 겸사겸사 학원 계정도 추가해서 홍보도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주디쌤 아이들 수업 영상 편집 좀 부탁해요."
뮤지컬, 요리 수업 강의 준비, 아이들 성적표 작성 등 강사 본연의 업무에 이어 때로는 아이들 수업 영상 편집하는 일까지 도맡아 하게 되었습니다.
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는데, 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묵묵히 퇴근 후에도 일했습니다. 다 경험이 되는 일들이니 오늘의 하루가 언젠가의 나에게 도움이 되기를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주디쌤 작년에 비해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어느 날 함께 일하던 강사님이 너무 마른 것보다 보기 좋다며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일을 시작하고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원장님은 저를 처음 봤을 때 업무 강도가 센 강사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랐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도 생기고 살도 찐 것을 보니 조금은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간 관심 가져왔던 고립 문제와 관련해서도 뭔가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 고립은둔청년 지원단체를 발견했습니다. ‘어?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네?’ 연락을 드리고 찾아가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