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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기를 돌같이 하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지

by 명랑 숙영


턱을 앞발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잇몸에서 뭔가 돋아나오려는 듯 간지럽다.

혼자 무료하게 있을 때 잇몸이 더 근질거리는 것 같다. 난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뭔가를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주변을 살폈다.

엄마가 자주 서 있는 주방으로 갔다. 쓰레기통 안이 궁금해 고개를 처박고 냄새를 맡았지만 헤집지는 않았다.

아빠가 문을 닫으면 '요란한 소리'가 나는 화장실로 갔다. 엄마가 강제로 목욕시키는 곳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화장실 안은 다양한 형태의 물건과 크고 작은 통이 벽 모서리에 즐비했다. 휴지통엔 휴지가 가득했는데 냄새가 궁금해 몇 개 꺼내 '흠흠'거렸다. 내 오줌 똥 냄새와는 사뭇 다른 이상 야릇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둥근 통 옆으로 갔더니 나를 씻길 때 쓰는 샴푸 냄새도 났다. 바닥에 물기가 '찰박찰박'해 발바닥 젤리가 다 젖었다. 차가움이 다리를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아득한 머리 위, 샤워기에서 '쏴아'하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아 가슴이 콩닥거려 얼른 나왔다.


이번엔 '거실엔 뭐가 있나' 어슬렁거리며 선반, 모서리, 탁자 밑, 가방 속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빠가 늘 앉아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탁자 위의 책은 모서리에 걸친 채 펼쳐져 있었다. 근데 그 속에 작은 뭔가 기어가는 게 보였다. 벌레 같아 잡으려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냄새를 맡으려 코를 갖다 댔더니 작은 생물체는 꿈틀대더니 빠르게 움직였다. 입으로 물기는 조금 무서워 오른쪽 앞발로 살짝 쳤는데 벌레는 온데간데없고 '툭'하고 책이 떨어졌다.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쳐버려 아쉬웠다.

책 속에선 익숙한 오래된 냄새가 났는데 회색 선 보다 더 끌리는 냄새였다. 사방 모서리가 딱딱하고 튀어나와 입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씹으니 잇몸이 시원했다. 책은 침범벅이 되어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날 저녁 난 아빠가 무서워 오줌까지 지렸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겁에 질렸다. 혼낼 때 아빠의 일그러진 표정, 독기가 뿜어져 나오던 입, 책을 들고 허공을 휘젓던 팔, 난 누운 채 얼음이 되어 꼼짝없이 그 공포를 견뎠다.

바짝 웅크린 채 떨던 몸뚱이에 경련이 날 때쯤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를 반길겨를도 없이 '이때다'싶어 황급히 안방으로 피신했다. 잠시 후 엄마 목소리는 아빠 목소리와 뒤엉켜 점점 더 격앙되었다.

엄마가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난 얼른 배를 보이며 앞발을 기역으로 오므리고 뒤 발은 쩍 벌린 채 고개를 돌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자두, 많이 놀랐지. 이젠 괜찮아.”

엄마는 상냥한 목소리로 배와 목덜미를 살며시 어루만져 주었다. 엄마의 손길을 느끼자 뛰던 가슴이 안정되고 떨리던 사지가 진정되었다.


아빠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며 혼낸 적이 없는데 '책'이란 놈이 대단하긴 대단한가 보다.

난 이제 절대 책을 물어뜯지 않는다. 책 보기를 돌같이 한다.

아니, 그냥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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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거실 바닥에 있는 회색 선을 물어뜯어 엄마를 놀라게 했다.

앞발로 누르고 이빨로 물어뜯으니 안에서 뭔가 나왔다. 약간 차가웠는데 자꾸 씹으니 끊어졌다. 이빨사이에 끼니 시원했다. 두어 차례 더 선을 끊었고 그때마다 엄마의 한숨과 아빠의 꾸지람을 들었다.

그렇다고 간지러운 이빨을 그냥 둘 수는 없다. 본능인걸 난들 어쩌나.

이번엔 아빠가 손에 쥐고 쓰는 딱딱하고 긴 물건을 골랐다. 가늘어서 입으로 물기 어려웠다. 엎드린 채 앞발로 일으켜 세워 이리저리 돌려가며 씹고 뜯었다. 잇몸에 딱딱한 부분이 부딪혀 시원했다.

힘껏 깨물었더니 ‘빠지직’하고 소리가 나며 부서졌다.

그 순간 ‘삐삐삐삐’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아빠면 어쩌지?' 덜컥 겁이 났다. 일단 배를 보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다행히 엄마였다. 엄마는 놀라며 길게 한숨을 쉬더니 내가 씹어서 부러뜨린 물건을 치웠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요즘 나를 혼내지 않는다.

일어나 엄마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눈치를 보았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더니 몸을 낮추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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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