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3부
그 계곡물 건너편엔 뭔가 거대하고 시커먼 벽 같은 것이 막아섰다. 그가 손으로 더듬어보니 바위 절벽은 아니었지만 흘러내린 낙석들이 간신히 켜켜이 쌓인, 차라리 절벽같이 깎아지른 비탈이었다. 그는 바짝 눈을 대고 낙석들의 어스름한 상방을 측량해 보았다. 거의 80도에 이르는 경사였다. 그는 마음이 매우 바빠졌다.
그가 서정락을 다져놓았던 다음날이었다. 달리 잘 데도 없었지만, 그는 지난밤에 그냥 푹 잤다. 물론 간섭도 없었고 눈총도 받지 않았다. 이재건 상사는 출근하자마자 서무병을 시켜 사건의 핵심관계자들을 불렀다. 제 반원 둘, 그러니까 서정락과 문제의 막내, 그리고 김신혁을 대동하고 3소대 2반 반장이 경례를 붙였다.
“하사 정용석 외 3명, 인사계 님께 불려 왔습니다.”
이 상사가 고리눈을 좌우로 부라리며 명령했다.
“전원 즉시 완전군장에 폐타이어를 끌고 행정반 앞에 집합한다. 정용석은 관리책임으로 일단 삼 일간 돈다.”
그는 문득 자기 반장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에이, 일을 왜 이렇게 처리하지?, 모든 마음의 정리가 돼 있던 그는 이 상사가 못마땅해졌다.
“김신혁! 너 이 자식, 인사계가 눈감아 준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네가 화장실에서 우권이 때린 놈들 대표로 돈다. 서정락! 싸―가지 없는 새끼. 넌 특히 반성해야 한다. 생활 잘한다고 인사계가 포상휴가도 보내주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아주 나쁜 새끼였어. 그리고 나우권! 너 뺑뺑이 돌면서 앞으로의 군 생활 잘 생각해라. 정용석을 제외한 세 놈은 인사계가 그만하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오전 일과 시작부터 오후 일과 끝날 때까지 끈다. 인사계가 지켜보겠어. 돌아가는 즉각 실시해라.”
완전군장이라 함은 방탄헬멧, 총, 탄띠와 거기다 끼우는 액세서리 일체, 방독면을 차는 단독군장에다가 배낭을 짊어지는 것인데, 배낭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빠짐없이 집어넣어야 한다. 텐트 1쪽, 지주대, 지주핀, 담배 한 보루 크기만 한 납산전지 1개, 예비전투화 1족, 작업모, 전투복 1벌, 속옷, 양말, 판초 우의, 세면 백 등을 꼼꼼하게 잘 욱여넣고 나서 침낭을 올리고 묶는다. 바깥 주머니에는 반합과 스푼을 넣고, 야전삽을 꽂고 물을 채운 수통을 단다. 아랫배에다 밧줄을 걸고 폐타이어를 끌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총은 각개 멘다.
육군 장병의 ‘뺑뺑이’로 재활용되는 트럭 폐타이어의 지름은 대략 1.5m, 30cm가량의 두께였는데―육공 타이어가 아니었다―그 트럭 바퀴 양쪽 면에 뚫린 구멍엔 나일론 밧줄이 매어져 있었다. 무겁고 넓게 드러누운 그 폐타이어는 자갈이 촘촘하게 박힌 지면과 마찰되면서 벅벅 긁혀대는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딸려왔다.
상황이 왠지 예상했던 것만큼 비관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는 그렇게 대충 무마되는 게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아직 그의 기분은 힘들게 폐타이어나 끌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이 상사에게 짜증이 났다. 일렬종대로 벌려 그들이 고집이 보통이 아닌 폐타이어를 끌고 다니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는 아랫배와 고관절을 파고드는 밧줄로 피가 통하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정상이 아닌 다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터져 나오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땅바닥만 보고 전진하던 그의 발부리가, 비틀대는 바람에 속도가 죽은 서정락의 폐타이어에 걸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그는 급히 중심을 잡았는데 허벅지가 뜨끔했다. 그는 확 부아가 치밀어서 다리의 실핏줄이야 터지든 말든 전투화 발로 냅다 서정락의 배낭을 빵, 걷어차며 을렀다.
“빨리 걸어. 개자식아. 너 개새끼. 제대하는 그날까지 내 갈궈 준다.”
앞서가던 정용석과 김신혁은 그걸 그저 쳐다만 봤다. 그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두세 걸음 밀려 나가며 서정락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다가 제 허리에 걸친 밧줄에 턱 하고 걸렸다. 서정락은 몸서리를 치며 그다음부터는 또 잡힐 새라 황망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제가 그래놓고도 그는 왠지 곧 겸연쩍어졌고 더 이상은 못할 짓인 것 같았다. 앞길이 점점 암담했다. 그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낯짝을 다시 확인해 본 후론 이제 서정락이 걷든, 뛰든, 뛰는 것처럼 걷든 상관 않고 그냥 자기 페이스만 유지하기로 했다.
서정락이 끙끙거리며 속도를 줄일 때마다 김신혁은 어떻게 알았는지 뒤돌아서서 쇳소리를 꽂아댔다.
“야, 이 새꺄. 그러니까 쫄다구한테 두드려 맞지. 개새끼, 빨리 안 따라와? 썅.”
그러면 채찍에라도 얻어맞은 노새처럼 서정락이 움찔댔다. 서정락의 처참한 몸뚱이는 팽팽한 밧줄을 당기려고 허우적댔다. 공기는 찜통 속 같았다. 형편없이 이지러진 머리통을 처박고 절뚝거리며 간신히 폐타이어를 끌고 가는 상병의 뒷모습이 점차 그는 싫어졌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일주일간의 작태들을 돌이키며 그런 심경의 변화를 중지시키려 애썼다.
네놈도 나 같은 일개 육군 병사일 뿐이다. 그런데 네 놈은 너무 심했다. 난 그따위 방식은 용납하지 않는다. 사나이끼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지만 네놈은 사나이가 아니었어. 네놈은 개같이 굽실대다가 ‘쫄다구’들에겐 잔인했다지? ……네놈 몰골을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난 네놈 같은 인간이 싫어. 네놈뿐만이 아니라 어떤 비열한 새끼들에게도 내 본때를 보여 주겠어. 난 이유 없이 네놈들의 가랑이 밑을 길 수 있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내가 왜 네놈 같은 것들을 감수해야 하지? 뭣 때문에? 제대를 위해서? 부모님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너처럼 병신 같은 새끼들에게 두드려 맞고 짓밟히면서 오직 시간을 견뎌 내는 것이 부모님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이란 말이냐?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국가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며 적진으로 돌격할 수 있는 자는 먼저 ‘남자’여야 하는 거다. 군인이기 이전에 사나이여야 한단 말이다. 네놈은 지금껏 ‘남자’라는 게 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네놈이 6일 동안 그 지랄할 땐 그 못생겨 처먹은 면상에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짓고 군대 고참은, 어떻게든 시간만 때워서 가슴팍에 작대기 세 개만 달고 나면, 후임병들을 마음대로 폭행할 수 있고, 그렇게 두드려 맞는 이들의 고통을 즐길 권한이라도 가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겠지? ……네놈의 가증스러운 위세가 떠오른다. 왜, 한 번 더 해 보지 그래? 지금 네 꼴이 뭐냔 말이다. 난 네놈을 결코 동정하지 않겠다. 네놈은 네놈의 비열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그는 이미 깊숙이 배긴 밧줄의 지속적인 통증 속에서 서정락의 뒤통수를 쫓아 걸었다.
공기가 확확 달아올랐다. 그는 흥건히 땀에 젖은 머리를 옥죄어 누르는 방탄헬멧과 군장들의 무게, 멍든 허벅지에 턱턱 걸리는 방독면 백, 멜빵이 목에 걸려 가슴을 쳐대는 총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억지로 딸려오는 폐타이어도 뻐근하게 그의 하체를 경직시켰고 아프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떻게든 계속해서 걷기 위해 그는 경멸과 증오, 괴로운 상념 따위를 그만 중단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는 자꾸만 독해져 가는 자기 자신에게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