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3부
다들 일어섰다. 그도 하는 수 없이 방탄헬멧을 뒤집어쓰고 배낭을 끙, 하고 짊어졌다. 지르밟힌 등짝이 저렸다. 나일론 밧줄 자국이 배기고 쓸린 하복부에다가는 엄두가 안 나서 조심스럽게 탄띠 위에다 걸었다. 햇볕이 좀 눅은 듯했다. 그는 이제 6학년 때를 떠올렸다. 여름방학이었다. 그때도 혼자만 서울 이모네에 남겨졌다. 서울 이모는 먼저 번듯한 아동복가게에서 서울 스타일의 반 팔과 반바지 한 벌을 그에게 사 입혔다. 서울 이모네와 이웃한 두 집이 같이 동해안으로 피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바캉스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던 시골 소년을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는 서울 피서객으로 콩나물시루인 직행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난생처음 대관령을 넘었다. 고도차 때문에 그의 귀가 먹먹해졌는데 코를 막은 다음 킁, 하고 바람을 불면 귀가 뚫린다는 것을 서울 이모부에게 배웠다.
목적지의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텐트라고 불리는 각양각색의 천막들을 분주히 펼쳐 세우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와 서울 이모의 아들, 옆집 남자아이들은 자잘하게 밀려오는 파도들을 종아리에 맞으며 열심히 해변에 널린 큼지막한 조개들을 주었다. 그는 특히 한 아름이나 모았는데, 촌놈을 신세계에 데려온 서울 이모네에 자신이 뭔가 보탬이 되려고 눈을 부릅뜨고 모래를 파헤치면서 부지런히 채집한 결과였다. 저녁 식사는 소년들이 주워온 것들로 끓인 맑은 조개탕이었고 세 집에 양이 충분했다. 그는 조개탕을 끓이는 금빛 석유 버너들도 그때 처음 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새벽에 그는 너무 추워서 잠을 깼다. 서울 이모가 사준 그 반 팔과 반바지 차림이었던 팔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사내아이들만 따로 자던 텐트에서 덜덜 떨며 일어난 그는 둘둘 감고 자고 있는 아이들의 담요를 빼앗을 수도 없었다. 역시 서울 애들은 얌체 같았다. 거친 파도가 몰고 오는 새벽바람에 텐트 지붕이 일렁거렸다.
내외끼리 자는 어른들 텐트로는 갈 수 없었던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어쩔 수 없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결국, 소녀 네 명이 모여 자던 작은 텐트로 접근했다. 그는 텐트 밖에서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큰딸 말고 꼭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현주 누나, 난 데요. 자다 엄청 추워서…….”
잠에서 깨는 그녀의 기척이 났다. 잠시 후 텐트의 지퍼가 열렸고 그녀가 눈을 비볐다.
“어쩌지? 여기도 덮을 게 더 없는데…….”
그녀의 부스스한 머리칼이 예뻤다.
“아, 잠깐만―”
아직 잠이 덜 깬 듯 그녀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서울 이모네와 옆집들은 다른 짐들을 버스에 바리바리 싣고 오느라 침구를 충분히 챙겨 오지 않았다. 돌아앉은 그녀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이거라도 ……입을래? 그래도 좀 덜 추울 거야.”
그는 자신이 그때 날름 그 옷들을 받아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좀 뜸을 들였던 것이 사실에 가까웠다. 아직 날은 어스름했지만, 하얀색의, 가슴 부위를 가로지른 한 줄 빨간 선이 있는, 무슨 타월 같은 촉감의 보드라운 긴 팔 티셔츠가 확실하게 보였다. 그녀의 바지는 밑단을 접었던 겨울 창경원의 바로 그 여성용 블랙진이었다.
그는 아까 낮에 중학생인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보았었다. 그녀의 옷을 받아 들고 돌아온 그가 한참 동안은 주저했다. 그러나 새벽 바닷가는 너무나 추웠고, 또 추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옷을 입기로 했다. 하얀 티셔츠에서는 옅은 향기가 났고, 간신히 그녀의 블랙진을 껴입었을 때는 허벅지와 엉덩이가 꽉 조였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의 예쁜 블랙진이 늘어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그건 조바심만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야릇하고, 흥분되고, 황홀한,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옷을 입었을 때 자연스레 그런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에 그녀에게 많이 미안했다. 그리고 자신이 감히 그녀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다음에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이른 아침, 여러 일행과 함께 일출을 보러 언덕의 끝, 바닷물 속에서 높이 솟아오른 커다란 암벽 위의 이층 정자 쪽으로 오솔길을 걸어갈 때 그녀가 돌아보곤 생긋 웃었다.
“잘 어울리네―. 그 옷, 몸 따듯해질 때까지 그냥 입고 있고, 오늘 밤에도 입고 자―, 추우면.”
그 옷들은 그녀가 제일 아끼는 것이었다. 특히 블랙진은 미제였는데 그녀가 서울 이모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사 입은 비싼 것이었고 이제는 그녀의 몸에 꼭 맞았다. 웬만큼 날씨가 더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그 옷을 벗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계속 새벽의 냉기가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는 하얀 티셔츠와 꽉 끼는 블랙진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 옷에서 그녀의 봉긋한 가슴과 매끈한 다리가 느껴졌다.
바다에서 불타며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정자에서 돌아오는 바닷가에서 그녀는 연탄불에다 금방 구운 쥐치포를 하나 사서 반을 그에게 찢어주었다. 남동생이 항의하자 그녀가 말했다.
“얘, 넌 네 돈으로 사 먹어라―.”
그녀는 자신의 남동생에게는 얌체 같았다. 그는 그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