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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등

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3부

by 김욱래

입에서 단내가 났지만 어떤 면에서는 폐타이어 뺑뺑이도 제법 괜찮다고 그는 생각했다. 새록새록 한 그녀의 소녀 시절 모습에 아련히 빠져있는 것도 좋았다. 아침 햄버거 하나를 우적거려 넘긴 후―폐타이어를 끌려면 먹어야 했다.―에는 침상에다 군장을 꾸려놓고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헐만 헌 겨?”

그를 지나치던 이권휘가 씩, 하고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그렇게 묻곤 했다. 그럴 땐 그는 그냥 피식 웃었다. 시원한 눈매의 이권휘와 한결 낯빛이 밝아진 손정원 등 몇을 빼고 정찰대의 모든 인원은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정오가 되면 군장을 던져버리고 점심을 먹었고 좀 쉬다가 오후 한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한결같은 뙤약볕 아래서 다시 폐타이어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일과시간이 끝났다. 조병주는 이제 집합을 걸지 않았다.


그는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그저 묵묵히 편하게 앉아있었다. 온몸의 근육도 빠근했지만, 이제 와서 겸연쩍게 새삼 앉은 채로 차려 자세를 취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야 좀 내무생활하는 맛이 났다. 내무반은 그렇게 사람이 좀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내무반에선 그에게 말을 거는 인원도, 쳐다보는 인원도 없었다. 매일 어디로 숨는지 차요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취침시간에도 옆자리의 차요철은 아예 내무반에서 사라졌다가 아침점호 때에만 잠시 발견되었다. 그는 이제 차요철의 아랫도리에는 관심을 끊었다.

폐타이어를 운전하기 시작하고부터 그는 내무반 안에서 이등병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은 자제했다. 손정원과 침상정리를 함께 할 정도였다. 어차피 그가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했다. ‘빤스’ 벗는 미스 리 같이 지저분한 노래나 엿 먹을 서열 같은 것 말고.


사흘이 지나도록 어떤 돌발행동도 없이 그가 그저 묵묵하게 제 할 일, 즉 폐타이어 끌고, 먹고, 침상 청소하고 조용히 자는 것을 본 인원들은 그에 대한 공포심과 모욕감, 자기 보호 본능으로 인한 쓸데없는 경계심 등을 슬그머니 희석시켰다. 그게 그들의 정신건강에도 더 좋았다. 그들이 계속 그러고 있는 것도 실상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암묵적이지만 결국, 어쩌면 서정락이 쫄다구에게 얻어맞을 짓을 했던 것이라고 여기게 된 소대원도 여럿 생겼다. 사실 그게 모두가 편해지는 결론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괴로운 군 생활이었다.


지난 금요일부터 끌기 시작한 폐타이어도 월요일이 되자 어느덧 그는 웬만큼 적응이 되었다. 그날부터 정용석이 빠졌다. 이제 그와 김신혁은 농을 슬슬 주고받을 만큼 허물이 없어졌다. 김신혁은 화장실에서 그를 밟기만 했지 맞아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고, 그 역시 이래저래 김신혁 일당에 대한 감정은 버렸다. 김신혁 역시 강한 자의 편이었다. 김신혁은 이제 서정락이 쳐지든지 말든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이 풀린 둘이 한참 재미있게 폐타이어를 끌고 있을 때였다. 정문을 통과한 검은색 중고 마크 V(MARK-V)*가 부대 막사 진입로로 접어들었다. 폐타이어 인원들이 단체경례를 부쳤다. 마크 V가 멈췄고 휴가를 찾아 먹고 출근하던 정찰대장이 내렸다. 보닛에서 튕긴 날카로운 태양 빛이 그의 속눈썹을 찔렀다. 정찰대장이 김신혁을 자기 승용차 앞으로 불렀다.


김 소령이 행정반에서 보고철을 챙기고 있던 이 상사를 제 방으로 불렀다. 이 상사는 꽤 오래 신병을 변호하고 선처를 요청했지만 김 소령은 막무가내였다.

“남자답다고? 걔, 태권도가 삼 단 이랬지? 아주 제 주먹 믿고 막 나갔구먼. 걔는 군대에 도전한 자식이에요. 그런 자식한테 기회를 주자고? 인사계, 여러 말할 것 없이 입창 조치 하세요.”

“전입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를 영창 보내려면 서정락이하고 김신혁도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 상사가 제동을 걸었다. 결국, 김 소령이 폭행 건으로 셋씩이나 헌병대 영창에 넣기는 곤란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필히 김 소령과 그의 부대에 대한 사단의 인식에, 특히 지휘관 진급점수에 영향을 끼치게 될 터였다. 김 소령이 말없이 이 상사를 째려보았다.

일직 보고를 하러 대장실로 들어온 정작 선임하사 장 중사가 늘어지게 경례를 붙였다. 그는 하극상을 벌인 신병처리에 관한 일로 정찰대장과 인사계가 옥신각신하는 걸 행정반에서부터 듣고 있었다. 김 소령이 대뜸 장 중사에게 물었다.

“정작은 어떻게 생각하나?”

“에, 저도 대장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판단됩니다.”

장 중사가 제 판단을 말했다. 김 소령이 상을 찡그렸다.

“무슨 말이야?”

장 중사가 이 상사를 흘끔 대다가 대답했다.

“예, 그게, 나우권만 입창 조치 해야 한다고 판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상사가 눈을 부릅떴다.

“자네, 시방 정말……?”

장 중사는 이 상사의 시선을 외면했다. 장 중사는 무조건 대장과 똑같은 판단을 하고 싶었다. 아마 김 소령이 문제의 신병을 한 번은 봐준다고 했어도 역시 같은 판단을 했을 것이었다.


김 소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상사는 그가 답답했다. 검붉은 얼굴이 이젠 푸르뎅뎅해졌다. 세상에, 들어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는 신병을 그 정도 일로 영창에 집어넣는 지휘관이 어디 있는가. 폐타이어도 나흘씩이나 돌고 있는데 이제 녀석을 볼 낯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이 부대의 인사계가 아닌가. 나이도 있는데 사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부어오른 이 상사가 따졌다.

“아니, 대장님. 지한테 이러시는 건 너무하시는 게 아닙니까?”

김 소령은 조용히 쏘아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깝깝한 일들이 이 상사의 머리에 스쳤다. 김 소령 때문에 병사들에게 면목이 죽던 게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사계 체면도 좀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겄습니까? ……오늘은 제가 말씀 좀 올려야 쓰겄습니다. 이번에 제가 따온 피엑스는 뭣 땀시 반납시켰습니까?”

이 상사가 우회 작전으로 따지고 들었다. 자신이 사단에 가서 제일 힘든 애들이라고 부득부득 졸라대서 거의 받을 수 있었던 PX였다. 준다는 데도 못 찾아 먹는 당신의 사단에 대한 이유 모를 과잉 충성, 아니 꼴사나운 아부 때문에 우리 애들은 다른 직할대나 보병연대 병력들처럼 초코파이나 과자부스러기는커녕 젊은 애들 그렇게 좋아하는 탄산음료조차 사 먹을 수 없는 거다. 그래서 당신, 사단에 점수 좀 땄냐? 당신 때문에 애들은 더럽게 맛없는 군용 소보로빵 껍데기에 붙어있는 작고 오돌토돌한, 달착지근한 밀가루 덩어리나 떼어먹으며 부족한 당분을 겨우 섭취하고 있다. 그래서 딸기잼이라도 발라 먹이려고 한 게 아침 햄버거였는데… 제길, 그건 어쩔 수 없다. 한번 받기 시작하면 1년 동안은 못 바꾸는 게 규정이니.

“정작은 그거 놓고 그만 나가 있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김 소령이 장 중사를 내보냈다. 행정반에까지 이 상사의 목소리가 걸걸하게 울렸다. 장 중사와 계원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전번엔 왜 그라셨습니까? 제가 그렇게 힘들게 수령해 온 위장복은 왜 반납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상사의 음성이었다.

“……아니, 그건 인사계가 한꺼번에 받아야 된다고 그런 거잖아. 아니에요?”

김 소령의 말꼬리가 죽었다.

“이젠 저한테 뒤집어씌우는 겁니까? 분명히 대장님이 모자 핑계를 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애들 앞에서 제 꼬라지가 뭐가 됐는지 아십니까? 참말로 이러시깁니까?”

이 상사의 말이었다. 김 소령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는 듯했다. 그다음엔 무슨 무슨 말들이 오가더니 이런 소리가 들렸다.

“상사 이재건. 전출을 요청합니다.”

벌컥 대장실 문을 밀어젖히고 나온 이 상사가 담배를 빼서 물고 빈 담뱃갑을 콱콱 구겨서 바닥에다 확 던졌다. 이 상사가 건진 건 그 신병의 영창을 십오일에서 1주일짜리로 줄이는 것뿐이었다. 뜨겁고 습하며 괜스레 팍팍 짜증이 오르는 날씨였다.




* 현대자동차가 ‘뉴 코티나’ 의 후계차로 미국 포드와 기술 제휴하여 만들어낸 승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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